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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5.연중 제21주일                                                              이사66,18-21 히브12,5-7.11-13 루카13,22-30

 

 

 

좁은 문

-구원과 멸망-

 

 

삶은 ‘좁은 문’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갈수록 좁은 문같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좁은 문에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좁은 문입니다. 결코 우열을 비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십자가와도 같은 좁은 문입니다. 어찌 사람만의 좁은 문이겠습니까? 우리 대한민국도 참 넘어야 할 첩첩산중에, 통과해 나가야 할 좁은 문의 연속입니다.

 

사람 숫자 만큼 좁은 문도 많습니다. 첩첩산중, 한 산 넘으면 또 한 산이듯, 좁은 문 통과하면 또 통과해야 할 좁은 문입니다. 어찌 보면 장애물 경기와도 같은 삶입니다. 형제자매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구동성, 공감하는 대목은 살아갈수록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여 하루하루만 살아간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삶에 지친 이들이 자주 찾는 여기 ‘영혼의 쉼터’ 요셉 수도원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고자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는 은총을, 힘을 얻고자 오늘 미사에 참석한 형제자매들입니다. 

 

삶이 힘들 때마다 고향 집을 찾듯이 수도원을 찾는 교구 사제 한 분이 생각납니다. 이분은 수도원을 일컬어 영적주유소, 영적충전소라 합니다. 수도원 정문을 들어서자 마자 바위판 아래, 바위판 위에 설치된 사제의 작품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성규57,9)

 

이란 수도영성의 모토가 붙은 거대한 바위판 아래 네 개의 벽돌에는 “1.네 마음을 다하고, 2.네 목숨을 다하고, 3.네 정신을 다하여, 4.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22,37), 바로 제가 그 사제에게 보속 처방전으로 써준 성구였습니다. 이어 옆의 바위판 위 설치 미술 작품도 인상깊었습니다. 벽돌과 컵에 쓰여진 글자였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기도하고!”-“운동하고”-“일하라!” 라는 말마디였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하는 사제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다짐처럼 느껴졌습니다. 후에 사제를 만나 격려했습니다.

 

“신부님의 소원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빠졌습니다. ”기도하고, 운동하고, 일하라!”에 “공부하고”가 들어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운동은 취미가 아니라 생존입니다. 기도처럼 시간을 내어 운동하기를 권합니다.”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일할 때 좁은 문도 잘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 교구 사제가 준 작년 사제서품 상본의 성구가 참 강렬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성구도 없을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마르14,36) 단 두마디 였습니다. 마침 어제 가톨릭 신문에서 읽었던 말마디가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원죄에서 해방된다.” 정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관계라면 아버지의 은총으로 좁은 문 통과는 걱정안해도 될 것입니다. 

 

이 사제는 친절하게도 상본 성구에 덧붙여 “아빠, 아버지!를 믿고 바라는 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는 새 힘이 솟아나리라!”(이사40,31) 말씀도 써서 선물했습니다. 얼마전 수도원에 피정 온 자매에게 준 말씀 처방전의 보속도 생각납니다.

 

“피정하는 동안 1.기쁘고, 2.평화롭게, 3.감사하면서, 4.사랑하면서, 5.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보속입니다. 아니 평생 그렇게 살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 평화, 감사, 사랑, 행복’의 삶을 살 때 좁은 문도 잘 통과할 것입니다.”라는 요지의 보속이었습니다. 

 

좁은 문의 연속인 우리 인생입니다. 새삼 좁은 문을 찾을 것은 없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누구나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내 좁은 문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예화로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경각심을 주는 복음 말씀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겠는지요? 바로 그 방법을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바라보라!”입니다.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주님을 모신 우리는 행복합니다. 수도원 십자로를 통과할 때 마다 주님 부활상을 바라보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기 수도원에 만31년 정주하면서 마음 답답하고 막막할 때 마다 주님을 바라보듯 가장 많이 바라본 하늘과 불암산입니다. 참 좋아하는 시편 구절이 생각납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시편121,1-2).

 

언제 어디서나 바라보라 있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보고 배울 분이, 스승이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보고 배울 주님이 계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제대 중앙에 높이달린 십자가의 주님을, 파스카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좁은 문의 현실일수록 주님을 바라보며 눈길을,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바로 영원한 생생한 꿈을 비전을 희망을 지니고 살라는 것입니다. 늘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삶의 중심을, 삶의 의미를 의식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인 하느님이, 하느님의 나라가,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와 주시어 좁은 문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구원임을 주님은 이사야의 입을 빌어 통쾌하게 선포합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나는 그들을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하느님의 영광을 앞당겨 바라보며 살 때, 우리 역시 주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복음 선포의 도구가 되고, 마침내 좁은 문들을 통과하여 주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평화가 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 때 우리 역시 주님의 영광과 평화로 빛나는 존재가 되고 좁은 문들의 통과에도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둘째, “배워라!”입니다.

배움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은 우리 믿는 이들의 필수 자질입니다. 삶은 시련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시련이요 영적전쟁입니다. 모든 시련을, 영적전쟁을 배움의 기회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배움의 필수 전제 조건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러니 모든 시련이나 역경을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이래야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고 영적성장에 성숙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주님의 전사요 훈련병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으로,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늘 초발심의 정신으로 새롭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배움의 기회로, 비움의 기회로, 겸손의 기회로, 성장의 기회로 삼는 이들에게 절망, 원망, 실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영적 탄력도 손상되지 않아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진인사 대천명의 자세로 시련에 온갖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도와 주십니다. 비단 개인 문제뿐 아니라 강대국의 틈 바구니 사면초가의 좁은 문의 현실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살 길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님의 다정하고 고마운 충고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내 자녀들이여,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그러니 우리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뎌 내십시오. 지극한 인내로 견뎌내며 노력할 때 주님의 은총으로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께 훈육을 받지 않는 자녀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돤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결코 값싼 요행의 평화도, 값싼 요행의 은총도 없습니다. 이런 극기, 절제, 자제, 인내의 자기훈련 없이는 절대 평화도 없고 좁은 문 통과도 요원합니다.

 

그러니 형제 자매 여러분,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 가 좁은 문을 통과하십시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는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될 것입니다.

 

 

셋째, “사랑하라!”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뿐이 길이 없습니다. 온 마음, 온 목숨, 온 힘, 온 정신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할 때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게 됩니다. 

 

사랑과 봄과 앎은 함께 갑니다. 사랑의 깨달음이요 사랑의 지혜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이어야 주님 뜻대로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좋을 대로 아무리 일 많이해도 주님께는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구원의 문은 닫히고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여도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주님은 냉랭히 대답하실 것입니다. 거듭 두드려도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정말 주님을 알았더라면, 주님과의 깊은 인격적 관계의 삶이었다면 이렇게 비극적 짝사랑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가 얼마나 치명적 악이요 병이요 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평생 살아도 주님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무지가 좁은 문의 통과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어디에 살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항구한 지혜와 자비의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 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죽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방심하지 말고 주님의 영원한 현역으로, 훈련병으로 사랑 실천에 만전을 다하라는 충고성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 잔칫상에 참석하면 세 사실에 놀란다 합니다. 1.내가 천국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2.천국에 올 거라 기대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데 놀라고, 3.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사람들이 와 있음에 놀란다 합니다. 

 

하느님 믿는 다고, 세례 받았다고, 교회 생활에 충실했다고, 기도 많이 했다고 구원의 보장이 아닙니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구원이고 참으로 사랑 실천에 항구할 때 천국의 구원은 보장될 것입니다. 누구나에 주어진 좁은 문의 평생과제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좁은 문의 인생여정입니다. 답은 셋입니다. 

 

1.주님을 바라보라!, 2.모든 시련과 역경을 통해 배워라!, 3.주님과 이웃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 입니다. 평생 이렇게 살 때 마지막 좁은 문을 통과하여 하늘 나라 천국에 입장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좁은 문의 통과에 매일의 이 복된 미사은총보다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아멘.

 

 

  • ?
    고안젤로 2019.08.25 09:04
    주님과 하는 이 모든 순간 순간에 주님을 향한 최선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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