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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8.연중 제23주일                                                               지혜9,13-18 필레9ㄴ-10.12-17 루카14,25-33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답게-

 

 

 

“주여,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에 이은 시편 90장이 참 은혜롭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자 안식처인 영혼의 쉼터인 주님을 찾아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단어가 쓰레기입니다. 인스탄트 세상이라 잘 포장된 인스탄트 물품, 식품에 쓰레기도 참 많이 나옵니다. 쓰레기 같은 거짓 뉴스, 기사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깨어 품위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 인스탄트 인간에, 쓰레기 인생이 될 위험도 다분합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 인간이 누구인지 치열히 찾지 않으면 참 나를 살 수 없습니다. 생각 없는, 영혼 없는 인간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지혜서가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 것 없고, 우리의 속 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그대로 육체를 지닌 우리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반영합니다. 그 옛날이나 고도의 첨단 문명을 자랑하는 오늘이나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 이고 고뇌와 고통도 계속됩니다. 참으로 우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귀착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찾을 때 참 내가 누구인지 압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우리는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인간이 갈구하던 지혜를 하느님은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지혜는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그 지혜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할수록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줍니다.

 

복음 서두 말씀이 평범해 보이지만 의미심장합니다.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에 흥분한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마치 인기스타를 방불케하는 예수님이요, 생각없이 추종하는 무리들 같은 느낌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주님 말씀입니다. 과연 다음 예수님의 말씀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지혜로운 답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자답게 살 수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되는 길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길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하느님의 지혜이자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 주님이요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하지 않으셨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갈 때 참 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라 잘 살고 있습니까? 갈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삶이 혼란하고 복잡한 것은 삶의 방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따를 분을 잃었기, 잊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갈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요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요 의미입니다.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이를 수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평생 죽는 그날까지 따라 살아야 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평생 따라야 할 길입니다. 30년전 사제서품식 미사때 입당성가 445장을 들으며 입장할 때 흘렸던 눈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내 온전하게 그 말씀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그분만을 따릅니다.”-

 

생명의 빛이신 그분만을 따를 때 복잡 혼란한 삶은 단순해지고 진실해집니다. 위로와 치유가 있고 두려움과 불안은 사라지고 고통과 시련중에도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하여 우리 삶은 예수님을 따라 살아감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기에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도 분명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란 말마디 그대로 예외없이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려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가족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덜 사랑하다’를 ‘미워하다’로 표현하는 사례가 잦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족 사랑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가족에게도 무집착의 눈밝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 예수님의 무정한 말씀을 약화시켜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근본적이고 무조건적인 추종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마주하는 사람에게 다른 인간적 관계들은 부차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도 올바로 집착없이 이탈의 정신으로 순수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를 절대로 망각해선 안됩니다. 하여 분도 성인도 그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공동체 형제들이 공동체의 중심인 예수님만을 사랑할 때 저절로 뒤따르는 형제애요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이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저절로 깊어지는 형제애요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주님 사랑이 답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마음의 병, 무지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참 나를 알게 되어 저절로 겸손과 지혜요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가족은 물론 모든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의 사랑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주님 사랑뿐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 사랑이 수도자는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의 성소입니다. 이런 예수님 사랑을 노래한 성가 61장이 생각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이 세상 부귀 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세상 명예 다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세상 어떤 것과도.”-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 사랑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사랑 때문에 수인까지 된 바오로입니다. 복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바오로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옥중에서 얻은 오네시모스를 ‘내 아들’이라, ‘내 심장’과 같다고 표현할 정도이니 그 지고하고 순수한 사랑에 감동하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만을 사랑할 때 형제들도 사심없는 집착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하느님 사랑 같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셋째,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분명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결코 우열이나 호오를 비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제 십자가입니다. 

 

누가 남이 대신 질 수도 없고 내려 놓을 수도 없는 각자의 제 십자가입니다. 제 고유의 책임의 십자가일 수도 있고 제 고유의 운명의 십자가일수도 있습니다. 이래서 삶이 외롭고 고독하고 힘든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거니 원망해서는 안되는 내 십자가의 짐입니다. 참으로 내 십자가가 무엇인지 잘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짐을 덜어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짐을 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여 기도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마침내 자기 책임의 십자가를, 자기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사랑하면 십자가는 선물이 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이 식으면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도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도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제 십자가가 빠진 삶은 완전히 자기 상실의 헛된 삶입니다. 구원도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각자 고유의 제 십자가야말로 천국의 열쇠, 구원의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 각자 제 십자가의 열쇠로 천국문을 열고 들어 가야 합니다. 자나깨나 살펴봐야 할 내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입니다.

 

오늘 복음 중 망대와 전쟁 이중 비유의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제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지 늘 깨어 삶을 점검하며 살펴 보라는 의미입니다. 도중하차 않고 죽는 그날까지 끝까지 제 십자가를 지고 완주해야 하는, 싸워야 하는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삶은 죽어야 끝나는 평생 마라톤 경기와도 같고 평생 영적 전투와도 같습니다.

 

넷째, 안팎으로 부단히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발적 버림과 가난, 비움의 삶입니다. 세상 소유물로 부터의 이탈입니다. 사람으로부터의 이탈에 이은 재물로 부터의 이탈입니다. 참으로 주님만을 사랑할 때, 참 좋은 보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저절로 버림과 비움의 이탈입니다. 예수님도 분명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소유냐 존재냐의 갈림길입니다. 소유에 눈이 멀어 노예되어 존재를 잃고 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사람들입니다. 소유의 주인이 되어 참 자유로운 존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하되 소유에 소유되지 않는 이탈의 자유는 참으로 예수님만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지금 당장은 실천하지 못해도 참으로 나날이 안팎으로 버려가는 이탈의 수행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집착이, 탐욕이 우리를 눈멀어 무지하게 합니다. 참으로 날마다 예수님만을 사랑하여, 제 십자가를 지고, 안팎으로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는 평생 삶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참 자유롭고 행복한 구원의 삶이요 참 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 ?
    고안젤로 2019.09.08 08:26
    에수님을 따라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갈때 참 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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