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13.월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1195-1231) 기념일
1열왕21,1ㄴ-29 마태5,38-42
회개의 생활화生活化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悔改뿐이다-
새벽부터 오랜만에 단비가 흠뻑 내리니 새삼 농사는 하느님 농부께서 80% 지으신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이렇듯 하느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은총중의 은총이 회개 은총입니다. 회개하는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얼굴의 성형成形이 아닌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마음의 성형이 이뤄질 때 본래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한 자기를 아는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회개하는 순수한 영혼들을 보면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덕聖德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덕은 회심回心과 참회慙悔의 역랑 안에서 자라납니다.”
엊그제 인용했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의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어제 카톡을 통해 어느 자매에세 보낸 격려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죄를 안지어 성인聖人이 아니라, 죄짓더라도 용감하게 회개하고 더욱 열렬히 하느님과 이웃을 한결같이 사랑하며 자기 책임을 다하는 이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성인입니다.”
저는 중요한, 마음에 각인하고 싶은 어휘에는 꼭 한자를 병기倂記하니, 한자와 더불어 보면 마음 깊이 각인되는 느낌이 듭니다. 평소 제가 느끼는 가장 아름다운 행렬은 둘입니다. 미사전례시 가난한 빈 손으로 성체를 모시기 위해 줄 서 있는 장면이요, 매월 첫 금요일 여기 수사들의 고백성사시 줄 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겸허하고 순수한 영혼의 모습들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도의 성자 간디의 장점은 “I was wrong!(내 잘못이다!)”의 명수였다는 일화를 잊지 못합니다. 수십년전 읽은 대목인데 지금도 생생합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정작 필요한 것은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말보다 잘못했을 때, 즉시 “잘못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라는 말임을 깨닫습니다. 구구한 변명이나 핑계보다는 이런 깨끗한 사과의 한마디 말이 일거에 마음의 앙금을 해소하여 관계를 정상화시킵니다.
“좌우左右나, 진보進步와 보수保守의 문제가 아니라 정상正常과 비정상非正常,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이 문제다!”
작금의 사회 현실을 통해 통절히 깨닫는 사실입니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사자성어를 기억할 것입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일컫는다는 뜻으로 고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뒤바꾸는 행위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너무나 비정상, 비상식이 일상화되어 있는 현실이요 정직하지 못한 정치 지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참으로 정상적, 상식적 사고를 지니게 하는 것 역시 회개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연상됐던 이런 묵상들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회개의 생활화-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뿐이다”로 정했습니다. 오늘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만 36세, 짧은 나이에 선종하셨지만 성인의 향기는 영원히 남아있습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우리 삶의 좌표가 되면서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성인이 포르투칼의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에 입회했다가 모로코에서 순교한 작은 형제회 수사들에게 큰 감명을 받은 성인은 작은형제회에 전속하여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지니게 됩니다.
이어 모로코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병으로 인해 귀국하는 도중 파선으로 인해 시칠리아 섬에 머물게 되었고 급기야 당대의 성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교류하게 되었고 큰 활약을 하다가 갑작스런 병으로 이태리의 파도바에서 36세 나이에 선종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섭리에 따른 파란만장한 회심의 여정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수많은 기적이야기와 설교 능력은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인 전설중 하나가 되었고, 그를 능가할 만한 설교가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의 강론은 ‘성경의 보물창고’,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는 칭송을 들었고, 그레고리오 교황 9세는 ‘신약의 방주’라 칭찬했습니다.
그는 이례적으로 선종 다음 해 그레고리오 교황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946년에는 비오12세 교황으로 교회학자, 복음적인 박사로 선언됩니다. 특히 성인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참으로 짧은 인생이었지만 성덕에 빛나는 완성의 삶을 살았던, 참으로 치열한 분투의 삶을 살았던 성인이었습니다.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답을 주는 성인입니다. 바로 회심의 여정에 항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성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일화가 참 황당하게 생각됩니다. 어찌 이런 악행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눈멀게 하는 무지의 탐욕에다 희대의 악녀 이제벨의 악행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죽음, 무죄한 사람, 나봇의 죽음입니다. 어찌 이리 태연하게 살인의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지 정말 무지의 악의 폐해에 전율하게 됩니다. 다윗 임금에게 죽은 바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연상케 합니다.
이래서 절박한 회개의 필요성입니다. 무지로부터 정상과 상식의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무지에 답은 단 하나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회개의 생활화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도 회개한 겸손한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삶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대당명제중 다섯 번째로 보복하지 말라, 폭력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다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참 대단한 내공이요 내적 힘이니 이 또한 회개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인 지혜요 관대한 마음입니다. 악에 대한 겁많고 비겁한 무저항이 아니라 적극적 선행의 실천이요 사랑의 저항입니다. 이렇게 적극적 사랑 실천의 저항으로 악을 무장해제武裝解除시키는, 무력화無力化시키는 이들이 정말 지혜롭고 겸손한, 강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옛 선인들의 지혜도 여기서 연유합니다. 악에 직접적으로 맞서 싸워서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악순환惡循環의 반복일뿐이요, 괴물怪物과 싸우다 괴물怪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래서 무지의 악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끊임없는 절박한 기도와 회개, 그리고 적극적 사랑 실천의 저항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를 통한 지혜와 겸손이 악을 무장해제 시키고 악의 힘을 무력화합니다. 이래서 수도원처럼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회개의 시스템”과도 같은 기도와 일이 조화와 균형을 갖춘 일과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 시편전례기도와 이 거룩한 공동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생활화, 회개의 일상화를 이뤄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