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7.6.연중 제14주간 수요일 호세10,1-3.7-8.12 마태10,1-7
참 빛이신 주님
-참 빛을 찾는, 반사하는 사람들-
다시 인용하여 나누고 싶은 지난 강론중 내용입니다. ‘하늘에 사랑의 별을 다는 어머니들’이라는 시와 어제 강론 말미의 내용입니다.
“하늘에 사랑의 별을 다는구나.
사다리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배나무 가지 열매마다 봉지를 쌀 때마다
하늘에 떠오르는 무수한 사랑의 하얀 별들
낮에도 환히 떠오른 사랑의 하얀 별들
하늘에 별을 다는 어머니들이다.
몸은 고단해도
얼굴은, 눈은, 마음은 별처럼 빛나는
배봉지를 싸는 '주님의 전사'인 어머니들이다.”
하늘에 별을 다는, 배봉지를 싸는 어머니들은 참빛이신 발광체發光體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 빛이신 사람들입니다. 참빛이신 주님이요, 참빛을 찾는, 반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어제 깨달음을 피력한 강론중 마지막 말마디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향한 부단不斷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비움과 겸손의 복된 순교적 삶이 유일한 처방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참빛이신 주님께 궁극의 답이 있습니다. 어제 우리는 참 자랑스럽고 감사하고 기쁘게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했습니다. 저는 또 감히 한국 성직자들은 한국은 물론 “남북을 포함한 한반도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로 칭하며 부단히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한국순교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마음입니다. 참으로 참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우리 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어제는 참 뜻깊은 좋은 축복받은 날이었습니다. 새삼 이렇게 수도회의 어른을 찾아뵐 수 있음도 큰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28년 동안 한결같이 '팔공산의 곰'이란 애칭을 들으며 은둔의 삶을 살고 계신 현재 85세 마르틴 아빠스님을 방문한 것입니다. 우리 한 형제는 정정하여 '아기곰'이라 했습니다.
흡사 “빛의 순례” 하루 여정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역시 참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마르틴 아빠스였습니다. 욕심을 비우니 편하고 자유롭다는, 무욕의 자유, 무욕의 지혜라는 결론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구구절절 많은 깨우침을 주는 참빛을 반사하는 삶의 지혜들이었지만 한 예만 소개합니다.
“우물이나 수도원 돈은 나누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썪는다. 부지런히 퍼내야 맑은 생수의 샘솟는 우물이듯 수도원의 돈도 그렇다. 나는 아빠스 재임시절 한해가 끝나는 무렵이면 재무에게 내년 6개월치 수도원 생활비만 남기고 남는 것은 무조건 아프리카 가난한 수도원에 주도록 했다. 그래도 언제나 부족하지 않고 차고 넘쳤다.”
저 역시 똑같은 이유로 내적으로 썩지 않기 위해, 매일 샘물을 퍼내듯 매일 강론을 씁니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믿으며 강론을 씁니다. 이 또한 참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일이며 순전히 100% 주님의 은총이라 고백하고 싶습니다.
어제 우리는 마음을 다해 아빠스님에게 사랑의 선물로 용돈과 더불어 배즙을 넉넉히 드리니 참 마음도 뿌듯했습니다. 노인들에게 ‘하느님’은 물론 현실적으로 ‘돈’과 ‘잡술 것’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어제는 빛의 순례였던 하루처럼 기쁨 가득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참빛이신 주님이요, 예외없이 참빛이신 주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얼마전 저는 홍명희가 쓴 “임꺽정” 소설 10권을 독파했습니다.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꼽는 분이었고, 정말 천재의 저력이 발휘된 홍명희의 임꺽정 대하소설이었습니다.
“빛이 없구나!”
책을 본 제 독후감 일성이었습니다. 문득 독일의 시성詩聖, 괴테의 “어둡다, 어둡다, 나에게 빛을 달라.”라는 임종어가 떠오릅니다. 인류의 참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없는 곳에서는 어둠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보복의 악순환의 역사임을 500년 조선시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래 된 18-19세기 조선땅에 그렇게 많은 순교자들이 나올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갈구渴求하던 참빛이신 주님을 발견했을 때, 만났을 때 들불처럼 번진 순교대열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빛을 찾는 사람들의 영적 본능은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참빛인 주님을 가리는 가짜 빛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종교 역시 세상에 동화同化되고 속화俗化되어 참빛을 반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 호세아 예언자 그대로 칠흑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환한 빛입니다. 발광체 하느님을 반사하는 찬연한 빛입니다. 그대로 오늘날 종교에 대한 비판같습니다. 참빛이신 주님을 떠날 때 허례허식은, 타락과 부패는 필연입니다.
“이스라엘은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 열매를 잘 맺는다. 그러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들도 많이 만들고, 땅이 좋아질수록, 기념 기둥들도 좋게 만들었다.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분께서 그 제단들을 부수시고, 그 기념 기둥들을 허물어 버리시리라.”
참빛 앞에서 여지없이 폭로되는 죄악의 타락상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의 어둔 현실을, 우리의 어둔 내면을 환히 밝히면서 심기일전心機一轉, 분발의 노력을 다해 새롭게 시작할 것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우리 모두 참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 멋진 참빛이신 주님이요 그 반사체 호세아 예언자입니다. 바로 여기 오늘 지금이 참빛을 찾을 때이며 참빛이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영원한 참빛이신 예수님의 등장을 봅니다.
참빛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빛을 반사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어, 세상에 당신 빛으로 파견되기 전,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으니, 주님의 참빛을 반사할 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정말 참빛이신 주님을 만날 때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임을 깨달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말마디가 중요합니다. 물리적 거리의 ‘가까이’라기 보다는 내적 친밀함의 ‘가까이’입니다. 날로 참빛이신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적으로 주님과 멀어질수록 어둠속에 악순환의 죄의 유혹에 떨어질 것임은 불문가지입니다. 바로 열두 제자중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가리옷이 그 적절한 반면교사가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당신의 빛’으로, 또 ‘당신의 하늘 나라’로 살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마태10,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