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5.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나훔2,1.3;3,1-3.6-7 마태16,24-28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자기 버림, 제 십자가를 짐, 주님을 따름-
어제 수도원을 자주 찾는 어느 젊은 교구 사제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이었습니다. 지금은 잠시 교구의 허락을 얻고 부모의 시골 은수처에서 휴양중인 사제입니다. 어제는 오전 고백성사후 집무실 문을 나서려던중 “청소를 하고 가겠습니다. 저는 청소를 좋아합니다.” 하더니 무려 1시간 이상 정성을 다해 신발장은 물론 입구 주변을 말끔히 청소하고 정리했습니다.
문득 예전에 읽은 ‘청소부가된 성자聖者’란 책이 생각났습니다. 수도원에 올 때 마다 고백성사를 보는, 오랫동안 만난 젊은 사제지만 전혀 새로운 모습의 발견이었습니다.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신부님의 은수생활은 문제가 없겠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하고 주변 청소와 정리정돈 잘하면 은수생활 문제 없이 잘 할 것입니다. 요즘 여름철 시골 생활이 ‘풀과의 전쟁’이듯 우리 삶은 일상의 전쟁입니다. 참으로 혼자살아도 삶이 중심과 질서가 잡히고 부지런해야 ‘일상의 늪’에, ‘일상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 저는 청소를 좋아합니다. 청소를 좋아하기에 영혼의 청소인 고백성사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 스물네시간이 부족합니다. 마흔 여덟시간이면 좋겠습니다. 하루가 너무 짧습니다. 날마다 머무는 시골 은수처에서 미사하고, 기도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곳곳을 청소하고 가꾸고 돌보고 정리정돈하다보면 하루가 금방갑니다.”
정말 무려 한시간 이상 떠나기전 말없이 묵묵히 정성을 다해 청소를 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거룩해 보였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이렇게 정성을 다해 살면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소하는 동안 수도원의 네 마리 개들은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청소부 성자, 신부님에게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메시지와 더불어 찍었던 여러 장의 청소장면의 사진을 전송했습니다. 신부님의 새로운 면모를, 열정과 순수를 새롭게 발견한 어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란 물음을 구체화한 질문이겠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결코 비상하지 않고 평범합니다. 청소에 정성을 다했던 젊은 사제처럼 각자 일상의 평범한 자리에서,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책임을 다하며 살면 됩니다. 예수님은 짧은 한마디로 당신을 따르는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외없이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삶의 길입니다. 이 삶의 평생 여정이 바로 구원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주님을 닮아 참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따라야 할 분명한 목표와 방향인 주님이 계시니 결코 길을 잃어 방황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주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이 자기 목숨을 잃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자기 목숨을 살리는 참나의 실현인 구원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지요.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지에 눈이 멀어 세상 우상같은 소유물이나 외적인 것들에 노예되어 자기 존재를 잃고 살아가는 지요. 지난 주일 교황님 강론중 강조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명심하십시오. 그분은 하느님과 악마를, 선과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재물, 돈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하느님과 악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느님과 악마가 아닌 하느님과 재물입니다. 재물이 우리 섬김의 대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요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새삼 악마보다 더 흉악하고 고약하고 무서운 것이 재물에 대한 탐욕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탐욕에 대한 궁극의 결정적 처방이 바로 십자가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의 날마다 아침마다 십자가의 길을 바치는 한 수도형제와 한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길에서 결정적 원동력은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열정과 순수요, 아낌없이 자기를 버릴 수 있고, 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자기 버림이요, 사랑의 제 십자가짐이요, 사랑의 주님 따름입니다. 모두가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기에 자발적 사랑과 기쁨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랑할 때 십자가는 가벼운 선물이 되지만 사랑이 증발하면 십자가는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타인의 십자가를 지라 하지 않습니다. 자기 고유의 십자가를 지라 하십니다. 바로 내 운명의 십자가요, 내 책임의 십자가요, 내 사랑과 섬김을 실천해야 할 십자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이라 합니다. 바로 각자 십자가의 길에서 사랑과 섬김의 실행이라는 내 책임의 십자가를 잘 지고 따랐느냐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의 사랑을 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소예언서 나훔서입니다. 나훔이란 이름 뜻이 “위로하는 이”라 합니다. 오늘 나훔은 유다에게 기쁜 소식과 위로를 전하는 반면, 아시리아의 니네베의 비참한 패망을 예언했고 사실 그대로 우상과 죄악의 소굴, 니네베 대도시는 초토화됩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는 경고가 됩니다. 바로 죄악의 유혹에 빠져 탈선하여 길잃어 버리지 말고, 시종여일 한결같이 각자 주어진 십자가의 길에 항구하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각자 십자가의 길이지만 혼자가 아닌 도반들과 “더불어(togrther)”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은 우리 모두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항구히 잘 따를 수 있도록 우리를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십자가의 길, 복음이 나올 때 마다 인용하는 제 좌우명 기도를 다시 나눔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로운 고백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