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토요일 ‘죽은 모든 이(All Souls)’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지혜4,7-15 로마6,3-9 마태25,1-13
슬기로운 삶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로다."(시편27,1ㄱ)
11월 위령성월 첫날 11월1일 우리는 '모든 성인(All Saints)'의 대축일을 기념했고, 오늘은 '죽은 모든 이(All Souls)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교회는 종종 세례받은 모든 사람을 ‘성인의 통공(The Communion of Saints)’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사도신경중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가 이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성도(saints)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세례받은 모든 구성원을 지칭합니다.
성인의 통공, 즉 성도의 교제는 세 그룹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는 성도라고 적절하게 불릴 수 있는 사람들, 즉 죽어서 지금은 영원토록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보며 관계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바로 어제 기념한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천국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장소라기 보다는 관계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지상에 살고 있는, 바로 하느님과 궁극적인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교회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세 번째 그룹은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죽은 모든 이들입니다. 아직 하느님을 직접 만날 준비는 되어있지 않은, 하느님의 현존에 들어가기 전에 여전히 어떤 정화과정을 거치는 분들로 우리는 이들을 연옥 영혼들이라 지칭하는데 그 과정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추측할 일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 안에서 세 그룹이 이루는 친교를 성인들의 통공이라 하는 것이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세 그룹의 영혼들이 주님 안에서 만나는 미사전례시간입니다. 그러니 첫째 그룹의 천상성인들과 둘째 그룹의 지상영혼들인 우리가 ‘죽은 모든 이들’에 해당되는 세 번째 그룹인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바로 오늘에 적절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생미사와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는 가족과 좋은 친지들을 기억할 것이지만, 기억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 역시 우리를 위한 이웃의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위령의 날은 우리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기에 참 좋은 날이기도 합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병고요 늙음이요 죽음입니다. 대구시 남산동 대구교구청 내 성직자묘지 입구 기둥에 새겨진 라틴어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는 두 글귀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 것을 가르칩니다.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가르침,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 역시 대동소이합니다. 예전 무려 26년 전 써놨던 죽음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땅위를 덮고 있는 고운 단풍잎들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은 귀환이다, 해후다, 화해다, 구원이다.
‘수고하였다,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들려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음성이다”<1998.11.10.>
언젠가 갑작스런 이런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죽음은 삶의 반영입니다. 하루하루하루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본질적 깊이의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선물같은 하루를 기쁘게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순간의 방심으로 마음을 놓치면 오만가지 욕심에 사로잡힌다. 악마는 마음을 놓친 찰나에 들어온다.”<다산>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사사로운 욕심이 만 갈래로 일어나 불이 없어도 뜨거워지고, 얼음이 없어도 차가워진다.”<송나라 진덕수의 심경>
그러니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의 삶의 질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이 얼마나 보다 어떻게 삶에 우리를 집중케 합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영혼들을 돌보신다.”
늘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슬기로운 삶이 제일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영원히 기다릴 수 있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주님없이 막연히 깨어 준비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이의 모범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한밤중 외침소리에 환히 빛나는 영혼의 등불을 들고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하늘나라 잔치를 상징하는 혼인잔치에 입장했지만, 후에 기름을 마련하여 돌아왔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좌절되었습니다. 바로 위 말씀을 임종어로 바치며 선종의 복된 죽음을 맞이한 성녀 젤투르다입니다.
문은 닫혔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문을 열어달라 호소하지만 주인의 대답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아주 냉엄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언제 죽음이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뿐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며 언젠가의 주님과 반가운 만남의 죽음도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날마다 깨어 있다 주님을 맞이하는 이 거룩한 매일미사전례 수행보다 선종의 죽음 준비에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