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8.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묵시18,1-2.21-23;19,1-3.9ㄱㄴ 루카21,20-28
희망의 순례 여정
“희망의 빛, 희망의 힘, 희망의 훈련”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묵시19,9ㄴ)
오늘 화답송 후렴은 그대로 어린양의 미사잔치에 초대받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이런저런 유익한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지난 10월4일 제가 주례한 혼인미사후 신부의 어머니가 했다는, 그의 남편이 전해준 고백글을 잊지 못합니다. 나이 40을 훌쩍 넘어 늦게 결혼한 외동딸입니다.
-결혼식을 마치자, 아내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위가 ‘장모님’하고 부를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이고 살았는지 몰라.”-
끝까지 희망을 내려놓지 않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린 신자 부부입니다. 결혼은 부부가 서로를 구원할뿐 아니라 부모들까지 구원함을 봅니다.
어제 일간지에서 읽은 주목할 기사도 소개합니다. “검찰권의 정치 무기화, ‘바나나 공화국 전락한다”제하의 내용이었고 공감했습니다. 바나나 공화국은 ’부패한 권력자가 지배하는 불안정한 후진국’이라 하는데 결코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되겠습니다. 또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앞둔 미국과 중국에 관한 기사내용이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전통에서 나오는 중국 정치지도자들의 깊은 지혜와 전략, 희망에 공감했습니다.
“이 불확실성이 중국을 불안하게 하지만, 트럼프의 거칠고 혼란스러운 정책이 미국의 분열과 쇠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는 중국의 기대도 높다. 트럼프가 중국에 단기적으로 나쁘지만, 장기적으로는 좋다는 판단을 많은 중국전문가들이 내놓고 있다. 지금 중국은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외적의 침입보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적 분열의 내란이요, 사람이든 나라든 아무리 작아도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고 견고한 일치를 이루면 안전합니다. 개인이든 나라든 “희망찬 미래”가 내외적 일치를 보장함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지도자들의 비전과 신뢰는 필수적 덕목임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이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바탕에 무엇을 쌓는지에 따라 사람의 격이 결정된다. 이러한 바탕과 단계를 아울러 성품이라고 한다.”<다산>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논어>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들은 부정적 비관적 성품에 아래로 통달한 소인이될 가능성이 다분하나, 반면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에 희망의 사람들은 긍정적 낙관적 성품에 위로 통달한 군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희망이 답입니다. 이제 곧 희망과 기쁨의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진선미(眞善美)의 성품 형성에 가톨릭의 깊고 아름다운 전례영성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12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지향도 ‘희망의 순례자들’로 오늘 강론 제목, "희망의 순례 여정"과 일치합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다가올 이번 희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일상의 삶 안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며, 우리를 희망의 순례자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주도록 기도합시다.”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호는 <희망의 원리>라는 책에서 넷을 말합니다.
1.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희망을 먹고 산다.
2.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삶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3.희망이 힘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삶을 쉽게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버텨 이겨낸다.
4.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5.희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행복을 약속한다.
베네딕도 규칙서 <4장 착한 일의 도구들에 대하여> 중 두 대목이 생생합니다.
1.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2.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절대로 실망하지 마라.
희망은 힘이자 빛입니다. 희망을 잃어 실망하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기 시작할 때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정신건강, 마음건강, 영혼건강에 희망보다 더 좋은 명약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희망을 둠이 최고의 처방입니다.
피정지도시 참 많이 다룬 주제가 “희망의 여정”이고, 아침 산책때 마다 부르는 “바다”라는 동요를 부르곤 합니다. 얼마전 피정 자매들이 거의 못 부르기에 알아보니 40-50대 자매들이었습니다. 60대후반이후는 대부분 열창합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오늘 성서가 말하는 궁극의 결론도 희망입니다. 예언자들은 물론이요 종말을 이야기하는 묵시록도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를, 구원을,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하는 종말 이야기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구원의 희망을 북돋아 주기 위한 종말 이야기들입니다.
역시 값싼 희망은, 값싼 영적승리는 없습니다. 희망과 영적승리만 아니라 모든 덕목이 즉 믿음이, 사랑이, 평화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을 감동 시킬수 있는 부단한 수행의 노력과 훈련이 절대적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진인사대천명,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한다.” 말마디들에서 한결같이 강조되는 바 노력입니다. 천재들 역시 잘 들여다보면 노력하는 천재들입니다. 천재에다 끊임없이 노력을 더해가니 당해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을 보십시오.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를 목격한 자들은, 구원의 희망의 실현을 목격한 자들은 온갖 시련과 박해를 견뎌 통과해온 주님의 전사, 희망의 전사, 승리의 전사들인 신자들입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바로 오늘 묵시록 19장 하느님 승리의 찬가를 우리 가톨릭 교회는 매주일 제2저녁기도때 노래합니다. 바로 공동전례를 통해 끊임없이 승리의 찬가, 희망의 찬가를 노래하는 영적훈련이 승리의 믿음과 희망을 날로 강화해 줍니다. 오늘 복음의 종말 풍경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밤이 깊으면 새벽도 동터오는 법입니다. 끝까지 버텨낸 이들이 동터오는 구원의 새벽을 맞이합니다. 복음의 마지막 장면이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와 더불어 실현되는 구원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그때에 사람이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런 하느님 승리의 영광을, 희망의 실현을 앞당겨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마다 한결같이 희망찬 삶을,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21,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