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30.토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로마10,9-18 마태4,18-22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
“주님을 찬양하라, 모든 민족들아.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 하여라.“(시편117,1-2)
오늘은 11월 위령성월 마지막 날이자 연중 34주간 마지막날이고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이며, 오늘 저녁성무일도부터는 희망과 기쁨으로 가슴 설레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새삼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연민과 질투, 모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러나 질투와 맞서지 말고 질투하는 이들을 연민하라.”<다산>
“훌륭한 장사꾼은 재물을 깊이 감춰 없는 것처럼 하고, 군자는 덕을 갖춰도 겉모습은 모자라 보인다.”<사기>
새삼 겸손과 연민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겠습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형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어부로 살았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대체로 벳사이다에서 태어나 카파르나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안드레아 사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사내다움’ 또는 ‘용기’를 뜻하며, 형 베드로와는 달리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뒤에는 그리스 지방으로 전교여행을 떠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서 제자인 스타키스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하며 그래서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안드레아를 초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봅니다. 형 베드로는 로마의 초대 총대주교, 동생 안드레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초대 총대주교가 되니 이 또한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어부, 생선장수, 밧줄 만드는 사람, 그리고 그리스와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며 키예프에 가서 선교했다는 전승 때문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러시아의 최고 훈장 이름이 사도 성 안드레아 훈장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가 순교한 곳은 그리스 아카이아 지역의 파트라이라고 하며,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합니다. 안드레아가 X자형 십자가를 선택한 이유는 그리스어로 X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글자였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아는 형장에 끌려갔을 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기쁨에 넘쳐 기도합니다.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다오.”
바로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입니다. 그래서 안드레아 사도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에는 십자가를 든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사도가 활동한 지역은 아니지만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스코틀랜드의 국기도 파란 바탕에 흰색의 X자형 십자가를 사용합니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이 성 파트리치오의 축일인 3월17일에 축제를 벌이는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 안드레아의 축일인 11월30일에 축제를 벌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의 X자형 십자가의 순교로 끝나는 생애가 감동적입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순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이요 첫눈에 이들의 내적갈망을 알아채신 주님임이 분명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버림, 떠남, 따름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서로가 첫눈에 반했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가정법의 물음은 부질없는 공허한 질문이니 하느님의 섭리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소 역시 가정법의 질문은 부질없는 질문이니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연의 부르심이 아니라 필연의 부르심입니다. 곧 이어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역시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한번의 부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부르시니 우리 삶의 여정은 성소의 여정, 부르심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결같이 시종여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버림, 떠남, 따름의 여정”에, 순교적 선교의 삶에 충실하다 먼 이국땅에서 X자형으로 순교한 사도의 생애가 가슴 먹먹한 감동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 선포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결코 듣지 못하면 믿을 수 없고, 선포가 없으면 결코 들을 수 없고, 사람들이 파견되지 않으면 선포도 없다고 강조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옛 사도들과 선교사들처럼 날마다 선교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교사들에 대한 하느님의 기쁨과 감동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다음 말마디가 우리의 선교열정을 북돋웁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10,15;이사52,7)
선교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새삼 선교는 우리 교회의 존재이유요 우리의 본질적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자체가,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주님 사랑을 알리는 선교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오늘 따라 미사시 주님의 강복후 마지막 파견 말씀이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의 참 좋은 응답이,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게 하는 일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