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님 수난기로부터 배우는 가르침-2022.4.10.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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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10.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이사42,1-7 필리2,6-11 루카22,14-23,56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님 수난기로부터 배우는 가르침-

 

 

 

요즘 무상無償의 선물들로 가득한 온누리 세상입니다. 대부분의 나무가 꽃나무들이라 죽은 듯 보였던 나무마다 피는 꽃들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무수히 아름다운 꽃들 만발한 수도원을 찾는 이들 역시 꽃처럼 보입니다. 어제 마침 나물 캐던 자매님이 산책하는 저에게 운동하느냐 묻기에 꽃을 보러 나왔다 했고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자매님도 꽃같아요!”

 

나이에 상관없이 아름답게 웃는 얼굴은 꽃같습니다. 그래서 고백성사 말씀 처방전 말씀에 참 많이 찍어 드리는 스탬프가 “웃어요!”입니다. 이걸 읽어 보고 웃을 때는 꽃처럼 예쁜 얼굴들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서로가 꽃’이라는 시도 풀꽃처럼 소박해서 좋았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나 없을 때 너 보고 싶었지? 생각 많이 났지?

나 아플 때 너 걱정됐지? 기도하고 싶었지?

그건 나도 그래.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참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서로가 꽃이고 기도로 살 때 잘 살다가 잘 죽는 삶입니다. 어제 가톨릭 평화신문에서 읽은 박노해 시인의 짧은 글도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향해 걷고 있다.

언젠가 어느 날인가 죽음 앞에 세워질 때,

나는 무얼하다 죽고 싶었는가.

나는 누구 곁에 죽고 싶었는가.

내가 죽고 싶은 자리가 진정 살고 싶은 자리이니

나 지금 죽고 싶은 그곳에서

살고 싶은 생을 살고 있는가.

이름 없는 수선화 꽃 무덤이 물어온다.”

 

내 좋아하는 곳,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평생 정주의 삶을 사는 수도자인 저에게 그대로 드러맞는 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다 주님 곁에 죽고 싶습니다. 정주의 지금 살고 있는 이 자리가 죽고 싶은 자리입니다. 또 자주 일부 말마디를 바꿔 산책중 자주 부르는 70년대 풍미했던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입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 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마지막 한 구절은 거듭 되뇌이곤 합니다. 수도자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평생 현역의 영원한 주님의 전사입니다. 이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를 때 마다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합니다.

 

만개한 파스카 봄철의 무수한 봄꽃들, 꽃처럼 피었다 꽃처럼 지라는 가르침을 배웁니다. “잘 살다고 잘 죽고 싶습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목사님이 소원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즉시 대답하고 흡족해 했던 답변이고 지금 물어도 이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산대로 죽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오늘 루가복음 수난기의 주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첫째, 참 좋은 선물로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참 좋은 선물의 삶은 일치를 주지만, 그렇지 않는 삶은 분열을 줍니다. 죽음에 앞서 일치와 평화의 선물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오늘 루카의 수난복음은 “성찬례를 제정하시다”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기신 최고의 멋진 생명의 선물이 바로 성찬례, 우리가 날마다 거행하는 미사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과연 내가 세상에 남길 선물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주 생각하는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정말 간절한 소원은 하루하루 주님과 이웃에게 선물로 살다가 선물로 떠나는 죽음이면 하는 것입니다. 짐으로 살다가 짐으로 떠나는 죽음이 아니라!

 

둘째, 참 섬김의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이어지는 수난복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친히 평생 섬김의 삶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남기는 주님의 유언입니다.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 하나만 있을뿐입니다. 왕처럼 군림과 권세의 왕처럼이 아닌 섬김의 종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 이맘때쯤 낮은 자리 작은 민들레꽃을 보며 위로를 받고 쓴 시가 생각납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

 

이름없는 민들레꽃처럼 낮은 자리에서 활짝 열린 섬김의 삶을 사는 작은 이들을 가득 채우는 하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필리비서 그리스도의 비움 찬가의 다음 대목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참 잘 요약한 읽을 때 마다 감동을 선물하는 비움 찬가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토요일 제1저녁기도 때마다 고백하는 마음으로 이 찬가를 부릅니다.

 

셋째, 참 겸손한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겸손한 삶은 온유한 삶이요 진실한 삶입니다. 겸손한자 주님의 도를 배우게 하시면 온유한 자 주님의 의로움을 살게 합니다. 참 사랑은 겸손한 사랑, 진실한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면 결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기에 딱히 탓할바는 아닙니다만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인했을 때 예수님의 베드로를 바라보는 눈길을 잊지 못합니다.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오늘 닭이 울기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회개의 눈물이요 회개를 통해 온유와 겸손, 진실을 회복한 베드로입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란 말이 생각납니다. 권세가 있으면 아첨하고, 몰락하면 냉대하는 세상의 인심을 이르는 한자성어입니다. 진실과 겸손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시 “호산나! 호산나!”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군중들은, 후에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광분狂奔하니 참 믿을 바 못되는 염량세태의 세상 인심입니다. 

 

넷째, 참 기도의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루가복음은 물론 수난기에 특별히 눈에 띄는 모습이 간절하고 항구하고 열렬한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모습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주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기도는 하느님과 사랑과 생명의 소통입니다. 잘 들어야 잘 기도할 수 있고 잘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기도의 비결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기도를 잘하고 싶은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참으로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더욱 날로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기도의 모범입니다. 감동적인 기도 장면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1.“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의 기운을 북돋아드렸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2.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인 임종어는 그 절정을 이룹니다. 평소 이렇게 사셨기에 이런 기도입니다. 역시 인간의 무지가 얼마나 치명적인 죄이자 병이자 악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시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임종어의 기도도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참 착한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수난기는 온갖 인간 군상들을 보여줍니다. 선인과 악인이 혼재해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세요. 누가 진짜 이웃인지는 곤궁한 역경에 처했을 때 그대로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시몬,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한 죄수, 예수님의 거룩한 임종장면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던 백인대장,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신 착하고 의로운 요셉 등 이런 착하고 진실하고 의로운 이들이 있어 염량세태에도 불구하고 살 힘을 얻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산대로 죽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 다 잘 죽을 수 있도록, 선물로 살다가 선물로 죽을 수 있도록, 착하게 살다가 착하게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살다가 기도하다 죽을 수 있도록, 진실하고 겸손히 살다가 진실하고 겸손히 죽을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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