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이들의 신원 -주님의 제자, 주님의 선교사-2022.6.11.토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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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11.토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사도11,21ㄴ-26;13,1-3 마태10,7-13

 

 

 

믿는 이들의 신원

-주님의 제자, 주님의 선교사-

 

 

 

메말라 죽어가던 대지가 하늘 단비에 살아나듯 이 거룩한 미사은총에 다시 살아나는 우리 메마른 영혼들입니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는 순간 문득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정체성의 위기를, 신원의 위기를 겪는 오늘날입니다. 세상을 성화해야할 교회나 주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동화되고 속화되어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을 통해 듣는 이구동성의 말은 결국 삶으로 직결됩니다. 사제들의 사제다운 삶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제들의 삶을 보고 배우는 것이 거의 절대적이라 합니다. 참으로 세상에 거슬러 예수님을 닮은 정말 영적, 내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의 삶을, 신원을 환히 비춰주는 본질적 내용으로 이뤄졌습니다. 복음 선포의 선교는 교회에 속한 우리 믿는 이들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로서의 우리의 신원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쫒아내어라.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나 이제나 똑같은 시공을 초월한 복음 선포의 명령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은 그대로 주님의 일을 계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그대로 물려 받아 실천하는 것입니다. 새삼 화두로 부각되는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이, 비전이 하늘 나라였습니다. 임박한 하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몸소 하늘 나라를 살았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언젠가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 할 하늘 나라입니다. 바로 이런 하늘 나라 꿈의 상실이, 정체성 위기의 근본적 원인임을 깨닫습니다. 

 

하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일어나는 기적이 바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임을 믿습니다. 하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주님은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주라 명령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비극적 무지의 현실은 그대로 임을 봅니다. 물론 역사의 진보는 믿지만, 여전한 탐욕의 현실에 과연 인간의 진보가 가능한지 문명의 야만시대, 반복되는 역사의 악순환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라 하십니다. 세상에 알게 모르게 대부분 앓는 병자들입니다. 참으로 심각한 병이 신앙을, 희망을, 사랑을 잃었을 때 영혼의 질병에 따라 오는 육신의 질병들입니다. 오늘로서 연중 제10주간이 끝나는데 영성체후 기도 첫 대목이 좋아 마음에 새겼습니다. 

 

바로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로 시작되는 대목입니다. 우리 병을 고쳐주시는 주님의 성체입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기에 앞서 우선 우리의 병부터 낫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다음엔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라 하십니다. 육신은 살아 있어도 영혼이 시들어 죽어가는,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영혼들을 일으키라 하십니다. 희망을, 꿈을, 사랑을 잃고 무기력하게,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참 많이 인용했던 말마디입니다. 이처럼 생각없이, 영혼없이 희망을 잃고 죽어 사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을 살려 일으키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앞서 우리가 날마다 미사은총으로 우선 먼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임을 일깨우면서 용기를 북돋아 줘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어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 하십니다. 현대판 영적 나병들은, 마귀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그 중심에 자리잡는 온갖 마귀들이요 이어지는 무수한 영적 나병의 질환들입니다.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癡,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나 옛 수도교부들이 말한 여덟가지 악덕들인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 교만을 통해 활약하는 마귀들이요 이와 함께 야기되는 온갖 영혼의 나병들입니다. 

 

참으로 총체적 문제덩어리인 인간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총체적 질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파스카의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병을 고쳐주는 미사은총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우리를 다시 살려 일으키시고, 영적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온갖 마귀들을 일소시켜 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새삼 주님 안에 머물러 지내는 관상기도와도 같은 성전안에서의 성무일도와 미사전례가 우리의 총체적 치유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미사에 참석해 치유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명령입니다. 이어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소유의 삶을 명하십니다. 온전히 소유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 삶을, 착한 신자들의 환대에 의지하여 최소한도의 삶을 살라 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철저한 가난을, 참으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한 가난한 삶, 존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늘 나라에 희망을 두었을 때, 하느님께 모든 신뢰를 두었을 때 가능한 무소유의 삶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무소유가 아닌 무소유의 정신을, 집착없는 무욕의 삶을, 이탈의 초연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한 분만으로 행복하고 부유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에게 직접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그 정신은 중요합니다. 선교사는 거지가 아닙니다. 이리저리 입맛대로 찾아 다니며 민폐를 끼치지 말고, 마땅한 한 곳에 머물라는 말씀이며, 그집에 머물게 되면 참 좋은 선물인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자신을 비운 삶의 통로를 통해 이웃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평화요, 평화와 함께 가는 영육의 치유입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닮아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빛나는 선교사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열두 사도에 이어 사도라 이름 붙이는 이는 단 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이 두 사도의 관계와 영적 우정이 참 각별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던 바르나바였습니다. 

 

다음 대목이 바르나바의 인품을 잘 보여 줍니다. 원래의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그 넉넉한 인품에 ‘위로의 아들’이라는 바르나바 이름을 갖게 된 사도입니다. 바오로의 부족한 면을 완전 보완해준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참으로 협조적이며 낙관적인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와 같은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특히 오늘 제1독서에서 보다시피 타르수스에 피신해 있던 바오로를 불러내어 1년간 그와 함께 안티오키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바로 그 중요한 순간에 바오로를 교회에 복귀시켰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의 사도’를 교회에 선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덕의 여정에서도 마찰의 순간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은 2007년 1월 31일 일반 알현을 통해 하신 말씀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이 두 사람은 두 번째 선교여행의 시작부터 갈등을 겪었습니다. 바르나바가 요한 마르코를 동료로 같이 데려가려 했던 반면, 바오로는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선교여행동안 요한이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인들 사이에서도 대립, 불화, 논쟁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저에게 많은 위안을 줍니다. 성인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성인들도 복잡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성덕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덕은 회심과 참회의 역량 안에서 자랍니다. 성 바오로의 후기 서한에서 마르코는 ‘나의 협력자’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용서의 역량이 우리를 성인으로 만듭니다.”

 

참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는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의 두 성인의 관계에 대한 통찰입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 합니다. 사실 무소유의 삶보다 더 힘든 것이 공동생활이요 서로간의 관계입니다. 새삼 공동생활의 관계에는 정답이 없음을 봅니다. 

 

서로 끊임없는 회개로 겸손히 자기를 비우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요, 이런 지칠줄 모르는 불퇴전不退轉의 용기로 한결같이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가 진정 성인이요 하늘 나라의 실현이자 참으로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으로, 성인으로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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