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믿음 -너그럽고 자비로워라-2016.9.25. 연중 제26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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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25. 연중 제26주일                                                 아모6,1-ㄱㄴ.4-7 1티모6,11ㄱㄷ-16 루카16,19-31


                                                                            회개와 믿음

                                                                    -너그럽고 자비로워라-


고즈넉한 가을 풍경이 흡사 시詩같습니다. 시詩같은 인생입니다. 어제 제자들과의 만남이 시詩처럼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어제의 각별한 체험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생전 처음 제자들의 모임 및 가을운동회에 간곡한 초대에 응답하여 참석했습니다. 38년전 신림초교 6학년때 제자들의 모임입니다. 14살의 어린이들이 이젠 머리칼 희끗희끗한 초로初老의 50대 중반에 접어든 제자들입니다. 두 가지 깨달음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 관계능력이구나! 아무리 공부 잘하고 똑똑해도 혼자서는 못산다. 아무리 힘들고 험한 세상이라도 공부는 좀 부족했어도 관계능력만 좋다면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구나. 삶은 관계이고 관계는 능력이구나.”


정말 동창회 모임에 참석한 제자들의 면면을 보니 원만한 관계로 직업의 귀천에 관계없이 잘 살아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공부 잘 했던 아이들보다는 관계가 좋아 두루두루 원만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던 밝고 씩씩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었는데 38년전 6-6반의 담임이었는데 38년후로는 흡사 6학년 13개반 전체의 담임이 된 듯 착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40년전 5학년 때, 제가 신발을 사줬던 가난했던 여 제자가 떠날 때 10만원 지폐뭉치를 꼭 손에 쥐어 주던 마음도 잊지 못할 어제의 감동스런 추억이 되었습니다. 혼자되어 식당일을 하며 두 아들을 키운 씩씩하고 생활력 강한 제자입니다.


교육의 목적도 ‘제 앞가림 하는 것과 더불어 사는 것’ 두 가지라 합니다. 사실 이 둘은 공동생활의 필수 요건이기도 합니다. 제 앞가림 하는 개인적 능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더불어 사는 관계능력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둘째는 하늘 나라의 깨달음이었습니다. 11시 동창회 회의가 시작인데 참석하는 제자들의 시간이 제 각각이었습니다. 하나 둘, 11시, 11시30분, 12시, 오후 1시에도, 1시 30분 끊임없이 편안하고 활짝 핀 반가운 얼굴로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 제약이 없었습니다. 저는 수도원 피정지도로 오후 1시30분에 출발했습니다만, 아마 그 이후로도 모임이 끝나는 오후 5시까지도 제자들은 계속 참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 하늘 나라 입장 모습이 이러하겠구나. 각자의 처지가 다르니 사람마다 회개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시간도 다 다르겠구나.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하늘 나라의 문 활짝 열어놓으시고 모두가 다 들어올 때 까지 문닫기 직전 까지 기다리시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그대로 들어맞는 두 가지 깨달음입니다. 비유의 등장 인물이 이름을 갖는 것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를 뜻하는 라자로라는 이름이 ‘가난한 이’에게는 참 잘 들어맞습니다. 바로 가난한 이를 돕는 일이 하느님을 돕는 일임을 깨닫게 하는 이름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아모스서에서 주인공 아모스 예언자는 ‘흥청거리는 지도자들’을 ‘향락에 빠진 지도자들’ 신랄히 꾸짖습니다. 이런 꾸짖음은 오늘 복음의 어떤 부자는 물론 오늘날 지도층에 있으면서 온갖 부와 권력과 명예를 누리는 ‘금수저’ 부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과는 달리 인간의 도덕적, 영적발전은 여전히 답보상태인 것 같습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불행선언에 이은 패망선언입니다. 이 또한 지도층 부자들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강론은 복음의 어떤 부자에 대한 집중적 탐구가 되겠습니다. 다음 묘사만 봐서는 어떤 부자의 죄목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이것이 두 사람에 대한 상황 설명 전부입니다. 어떤 부자가 많은 유산을 받아서, 또는 열심히 일해서 이처럼 부유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크게 비난할 바 못됩니다. 금수저로 태어나 또는 스스로 노력한 결과 금수저의 삶인데 누가 왈가왈부 합니까? 또 라자로에 대한 뚜렷한 악행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 관점이고 어떤 부자는 모습은 사람이지만 실상 사람이 아닌 괴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이 망가질 수 있는지, 변질될 수 있는지 불가사의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관계가 차단 고립되면 이런 괴물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어떤 부자는 하느님도 몰랐고, 이웃도 몰랐고, 자기도 몰랐습니다. 인색했고 눈꼽만큼의 너그러움도 자비로움도 없었습니다. 타고난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싹도 보이지 않습니다. 배운 것이 혼자 잘 먹고 사는 것만 배웠다면 이거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도, 이웃도, 나도, 모르는 무지無知가 얼마나 큰 죄罪요 악惡이요 병病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진짜 공부는, 평생공부는 하느님을, 자기를, 이웃을 알아가는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평생平生 교육敎育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깨닫습니다. 하여 끊임없는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가 완전 차단된 자기 감옥에 갇힌 형국의 어떤 부자는 그대로 지옥의 상황입니다. 이어지면 살고 끊어지면 죽습니다. 특히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겐 연대는 생존이요 생명입니다. 어떤 부자는 이런 이웃과의 연대連帶도, 연대의식도 전무한 고립단절의 존재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 보면 이게 전부인줄 습성화되어 완전히 자기폐쇄, 자기만족의 삶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 어떤 부자에게 라자로는 같은 사람이 아닌 그저 개, 돼지 같은 존재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라자로는 어떤 부자를 구원하기 위해 보낸 하느님의 선물이자 시험이었습니다.


라자로의 죄는 라자로에 대한 무시가 아닌 철저한 무관심이요 무관계였습니다. 바로 오늘 날, 빈부 격차의 심화로 계급사회가 도래한 듯한 암울한 시대의 지도층 부유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화입니다. 무지로부터, 무관심으로부터, 무관계로부터의 탈출하여,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 중 섬광閃光같은 깨달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하늘나라에 들어와야 하늘 문도 닫힐 것입니다. 하여 섬광처럼 스친 생각은 어떤 부자의 사후의 모습은 그대로 꿈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생각없이, 영혼없이 호화롭게 살다가 죽은 후를 꿈꾸며 그림을 보듯이 환히 본 것입니다. 하느님은 충격요법의 꿈을 통해 어떤 부자를 회개시킨 것이지요.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 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꿈의 시작입니다. 이어 전개되는 불길 속에서의 고초를 겪는 어떤 부자의 지옥체험, 아브라함과의 대화, 건널 수 없는 라자로와의 큰 구렁, 다섯 형제들이 회개하여 이곳에 오게 하지 말게해 달라는 간청 등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이런 생생한 현실을 꿈꿨다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이런 꿈을 꾸고 난 어떤 부자라면 완전 회개했을 것입니다. 삶의 감격에 라자로를 완전히 한 형제의 이웃으로 대했을 것입니다. 어떤 부자와 라자로와의 깊은 단절의 큰 구렁도 사랑의 나눔으로, 관계의 완전 회복으로 메꿔졌을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소원하시는, 기뻐하시는 현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어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사후 세계의 뒤바뀐 처지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는 물론 부도덕한 부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데 주 목적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서 회개이지 죽으면 회개도 못합니다. 살아서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찬미와 감사도 못합니다. 살아서 사랑이지 죽으면 사랑도 못합니다. 영원히 끝나고 모든 것이 고정, 확정됩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라, 회개하라, 찬미하라, 감사하라’고 우리 삶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예로 든 ‘3걸’이 생각납니다. 죽을 때 후회하는 3걸은 “좀 더 즐겁게 살 걸’ ‘좀 더 참으며 살 걸’ ‘좀 더 베풀며 살 걸’이라 합니다. 서로 간의 좋은 관계에 결정적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회개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직결되는 회개입니다. 믿음의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의 전사戰士'로써 믿음의 싸움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우리 모두를 향한 힘찬 격려성 권고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을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우리 모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시다. 바로 이 하느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온갖 좋은 것을 선물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146,1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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