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9. 대림 제4주간 월요일 판관13,2-7.24-25 루카1,5-25
하느님의 선물
-끊임없이 복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
제 좋아하는 말마디중 하나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강론중 주제를 무엇으로 할까 고심하며 두루두루 주석을 읽어가던 중 ‘삼손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며, 그의 탄생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대목에서 착안한 강론 제목입니다. 평범하여 때로 잘 잊고 지내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말마디입니다.
얼마전 혼인미사중 ‘참 좋은 선물’이란 강론 제목도 생각납니다. 배우자 자체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주 피정자들에게 화두처럼 던지는 물음입니다. 대부분 망설이다 “선물이요.” 대답하고는 웃습니다. 아마 삶은 선물이자 짐임을 깨닫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니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함께 사는 이들, 만나는 이들은 물론이고 주어진 많은 것들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역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도대체 하느님의 선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자각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하느님 선물중의 선물이 사람입니다. 아기의 탄생이야 말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원해도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는 아기입니다. 하여 아기의 탄생은 온 집안의 희망이요 기쁨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없어 우울하고 어둡던 집안에 아이가 탄생했을 때의 그 기쁨은 구원의 기쁨에 필적할만 합니다.
“해인, 예은, 고은, 은화, 다운, 담비, 빛나라, 예슬, 예진, 은지, 한별, 진리, 아라. 초예, 해화. 예지. 보미, 한솔, 다빈, 다혜, 은정, 진아. 지혜, 다영, 슬기, 단비, 은별,---”
문득 생각난 세월호 참변으로 사라진 이젠 하늘의 별들이 된 예쁜 이름들입니다. 부모는 죽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희망의 별’같은 아이를 잃었을 때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하느님과 부모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삼손의 탄생 예고와 탄생’이 소개되고,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가 소개됩니다. 삼손의 이름 뜻은 ‘태양’이고 요한의 이름뜻은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라 하니 이름뜻에 이미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존재가 환히 드러납니다.
저에겐 흡사 두 경우가 거룩한 태몽처럼 생각됩니다. 거룩한 삶에 거룩한 태몽이요 아기 탄생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는 태몽이야기도 많았는데 오늘은 태몽에 대해 거의 들어보기 힘든 삭막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사악의 어머니 사라, 야곱과 에사오의 어머니 리브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처럼, 오늘 독서의 삼손의 어머니와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역시 불임不姙의 석녀石女였습니다. 더구나 즈카르야의 아내이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그 남편과 더불어 나이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천사의 아기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의 아내를 향한 주님의 천사의 전갈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기위해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던 중 즈카르야의 놀라운 하느님 체험입니다. 말 그대로 두 경우 하느님의 전적인 개입임을 깨닫습니다. 즈카르야, 엘리사벳은 나이도 많았지만 다음 묘사에서 보다시피 이 부부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아이가 없어도 이렇게 사는 부부의 삶자체가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디. 이런 삶의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은 세례자 요한을 선물로 주셨고 주님의 선구자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삼손이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판관의 사명을 띠고 태어났듯이,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을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오늘 복음 말미의 엘리사벳의 고백이 공감이 갑니다. 엘리사벳은 요한의 이름 뜻대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깊이 체험했을 것이고 하느님의 선물인 아기 요한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잘 키웠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묘사되는 삼손의 성장과정도 아름답습니다.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 우리 아이들이요,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아이들뿐 아이나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복을 내려 주십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중의 참 좋은 선물이 매일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