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고해苦海가 아니라 축제祝祭이다-분별의 지혜-2017.1.16. 연중 제2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1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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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6. 연중 제2주간 월요일                                                                                히브5,1-10 마르2,18-22




                                                            삶은 고해苦海가 아니라 축제祝祭이다

                                                                         -분별의 지혜-



단식은 예로부터 자선과 기도와 더불어 전통적 수행이었습니다. 유다교인들은 일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의무적으로 단식하였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고행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듯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였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보요 술꾼’으로 통한 스승의 영향으로 예수 생전에는 속죄의 날을 제외하고는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수행의 근본적 취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수행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수행은 사랑의 표현일 뿐입니다. 단식의 수행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식의 때를 알라는 것입니다. 수행자체에 매일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잣대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한 말씀으로 정리해 주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혼인잔치는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시대야 말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구원의 때로 정의하시며 단식의 때가 아님을 알려 주십니다. 여기까지가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후반부는 초대교회 관행의 반영입니다. 


교회시대 단식의 동기는 신랑이 떠나 혼인 잔치가 끝났기 때문에, 즉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흥이 깨졌기 때문에 단식해야 한다는 취지가 위 말씀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1세기 교회는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마 예수님이 운명하신 금요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세기 말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했음을 디다케 문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단식해야 하겠습니까?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혼인잔치 같은 축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여 매일미사의 수행입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미사은총입니다. 하루하루 주신 하느님의 선물의 날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기쁨의 축제같은 삶을 사는 것,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매주 금요일은 금육을 권하며 재의 수요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은 금육과 더불어 아침은 단식을 지킬 것을 권합니다. 바로 이날이 단식의 때로 가능한 한 준수하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본인의 자발적 회개나 사랑의 동기로 단식할 수는 있겠지만 철저히 숨겨져 있는, 그러나 어려운 이웃과 내적으로 연대하는 겸손한 사랑의 단식이어야 합니다. 무겁고 어둔 단식이 아니라, 참으로 가볍고 밝은, 자유롭게 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바로 이 말씀이 분별의 지혜를 대변합니다. 새 포도주의 은총을 담기에 적합한 늘 새 부대의 마음과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전통을 늘 오늘의 현실에 새롭게 비춰보며 적용해 사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축제의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삶은 고해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의 축제입니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의 대사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분별의 잣대입니다. 누구보다 우리의 마음을 속속드리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며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다음 말씀이 우리에겐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바로 여기서 기원하는 대사제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이요 이런 예수성심의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우리 고난의 정체 역시 환히 밝혀 집니다. 우리 삶은 이런저런 무수한 고난과 시련을 통해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순종 수행을 통한 내적 성장과 성숙으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신 주님께 이르고 우리의 분별의 지혜 역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분별의 지혜를 선사하시면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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