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11. 성주간 화요일 이사50,4-9ㄴ 요한13,21ㄴ-33.36-38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다
-허무虛無한 삶에서 충만充滿한 삶으로-
하느님이 미래며 희망입니다. ‘미래가 없다’ ‘희망이 없다’ 말하는 분들에게 저는 주저함 없이 ‘하느님이 미래이며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궁극의 미래는 하느님이며 이런 하느님께 희망을 둬야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임을 늘 강조합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본질을 놓치면 안팎으로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본질이신 하느님을 꼭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잡으면 다 놔버려도 되는데 하느님을 놔버리면 잡을 것이 너무나 많아 집니다. 삶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싸움입니다. 어느 유명인사의 대담시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마음가짐, 가치관이 중요해요. 거기에서 자아정체성을 갖게 되거든요. ‘나는 누구다.’라는 걸 분명히 인식하면 말기 암에 걸렸던 사람도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회복 가능성이 굉장히 높대요.”
공감했습니다. 치유에 앞서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자아정체성의 확보가 우선입니다. 이래야 존재감 높은, 자존감 높은 삶입니다. 자기를 잊고, 잃고,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이 만병의 근원입니다. 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함이 살길입니다. 하여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가 한결같이 고백성사 보속으로 가장 많이 주는 다음 말씀 처방전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어렵고 힘들수록, 삶이 무겁고 어둘수록 이렇게 살아야 무너지지도 망가지지도 않습니다. 어제 병원에서 물리치료시 만난 노신부님의 모습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신부님께서 “나 ---신부요. 치료 잘 받고 오시오.” 먼저 자기 소개후 친절히 인사후 떠난, 그동안 뵙지는 못했지만 익히 알아 온 노신부님이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너무나 노쇠한 평범한 노인이었습니다. 너무나 초라하여 외관상 신부님임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들어 간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구나 새삼 깨달았습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생명의 빛은 점차 사라져가고 죽음의 어둠이 점점 스며드는 그런 것입니다. 노인의 마지막 적은 질병이나 통증이나 장애가 아니라, 자신이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이며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끝까지 품위를 유지하며 ‘--답도록’ 살기위해 참으로 생명이자 빛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27,1ㄱ).
어제의 화답송 후렴 그대로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의 나의 생명, 나의 기쁨이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봐도 하느님이 삶의 중심이며 의미이심이 잘 드러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어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 이은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입니다. 초대교회신자들은 물론, 우리들 역시 주님의 종, 예수님께 대한 예언으로 믿습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이사49,4ㄴ).
하느님을 잊을 때, 잃을 때의 결과는 이런 허무입니다. 하느님의 빛이 사라지면 저절로 스며드는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입니다. 누구나의 실존적 체험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을 살린 것은 하느님이었습니다. 다음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이사49,3ㄴ)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49,4ㄷ)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49,5참조)
세례성사로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들 역시 예수님처럼 이런 주님의 종입니다. 바로 이게 우리의 복된 신원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이런 주님의 종으로서의 신원의식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처한 분위기를 보십시오. 사랑했던 열두제자들 중 유다의 배신에 이어 베드로의 배신이 예고되는 참으로 음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입니다.
-예수님;“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제자;“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13,21ㄴ-26ㄱ참조).
유다가 빵을 받자 사탄은 그에게 들어갔고, 유다가 빵을 받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밤이었다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착잡하고 어두웠겠는지요. 예수님의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힌 것은 영광의 빛이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영광, 당신의 영광이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찾은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도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13,31-32).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아버지의 영광, 아드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세례성사로 주님과 하나된 우리에게도 이 거룩한 성사를 통한 복된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고, 하느님께서도 몸소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재감 높은, 자존감 높은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삶은 허무가 아니라 충만이요 고해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