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구원의 길-2017.8.11. 금요일 성녀 클라라 동정(1194-1253)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11,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7.8.11. 금요일 성녀 클라라 동정(1194-1253) 기념일

신명4,32-40 마태16,24-28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구원의 길-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가 낸 책 제목이자, 25년전 1992년 1월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 미사 때 제가 한 강론 제목입니다. 그때의 강론 제목은 물론 내용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오늘은 이 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란 분명한 물음으로 요약됩니다. 


앞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심으로 제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 예수님은 오늘 숨돌릴 틈도 없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엄중한 상황을 상기시키며 재차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주님의 배려도 고맙습니다. 주님은 산상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체험으로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보여 주시며 십자가의 길 도상에 있는 제자들을 위무하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지난 주 이미 우리는 주님 변모 축일을 경축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너무나 단순명확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란 말마디에서 보다시피,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만고불변의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은 이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제 십자가와 주님을 따르는 일을 망각했을 때 자기 목숨을 잃습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시도가 결국은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길이 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일 같지만 실상 목숨을 얻는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목숨을 잃어 마음은 여전히 공허하고 불행하다면 온 세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살아있음의 기쁨과 보람이 있어야 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비로소 진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잣대 역시 얼마나, 어떻게, 예수님을 충실히, 항구히 제 십자가를 지고 따랐느냐가 될 것임은 다음 주님 말씀이 입증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주님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뒤를 따르는 우리들을 늘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을 충실히 따를 수 뿐이 없습니다. 문제는 망각에 있습니다. 무지에 이은 망각이 마음의 병입니다. 이래서 신구약 성경뿐 아니라 내 삶의 성경도 자주 렉시오디비나 하여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상기하여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모세도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동체 삶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하며 하느님의 위업을 상기할 것을 촉구합니다. 모세는 계속 물음체로 이들에게 위대한 하느님의 업적을 상기시키신 후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초점은 바로 오늘에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새 모세, 예수님의 명령은 아주 단순명쾌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닌 각자 고유의 제 십자가입니다. 피할 수도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고, 남이 대신 져줄 수도 없는 내 십자가의 짐이자 선물입니다타고난 한계와 약함, 주어진 내외적 환경도 다 다르기에 다른 이들의 십자가와 비교할 것도 없고, 굳이 제 십자가를 애써 찾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알게 모르게 각자 제 운명의, 책임의 십자가가 주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고 적게 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를 살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랐느냐가 구원의 잣대입니다. 성인들은 모두가 제 십자가를 지고 충실히, 항구히 주님을 따랐던 분들입니다. 비단 성인들뿐 아니라 사람이 되는 길도 이 십자가의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야 말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인간의 길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도 우리 모두 제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을 잘 따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끝으로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의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