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4.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요엘4,12-21 루카11,27-28
행복은 ‘선택’이자 ‘발견’이요 ‘선물’이다
-참 행복한 사람들-
몇몇 여담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이 참 짧고 알차서 좋습니다. 단 두절입니다. 말도 글도 기도도 간절하고 진실할수록 짧고 단순합니다. 예전 뉴튼수도원에서 어느 한국 신부님의 영어 강론에 한국 수사님이 ‘참 강론이 좋다.’는 반응에 신부님은 반색하며 ‘무엇이 좋았느냐?’물었습니다.
“짧아서 좋았습니다.”
수사님의 짧은 대답에 신부님은 다소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강론 역시 짧으면 대부분 좋아합니다. 요즘 몇권의 신간 서적을 주문하여 받았습니다. 놀랐습니다. 표지 디자인이 참 아름답고 신선하여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저절로 감지될 정도 였습니다. ‘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구나!’저절로 탄성이 나왔습니다. 표지뿐 아니라 글도 얼마나 정성껏 잘썼는지 감탄할 정도 였습니다.
어느 분은 요즘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했습니다. 우리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세계적 수준이라 한국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각분야에서 참으로 열심히 정성을 다해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입니다. ‘남한산성’ 영화 대본에 기울인 감독의 노고를 들으니 역시 감동적이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제는 참으로 오랜만에 휴대폰을 교체하느라 하루 종일 휴대폰 없이 지냈습니다. 아, 이렇게 넉넉하고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속을 떠난 수도자들이라 하지만 휴대폰과 인터넷도 이젠 수도원 깊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에 노예되어(?) 살아가고 있는지요.
휴대폰으로 참 편리하고 신속해진 세상인데 그만큼 우리 삶도 행복해졌는지 묻게 됩니다. 휴대폰으로 잃고 있는 것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이제는 휴대폰 없는 세상은 상상도 못할 것이며 참으로 분별과 절제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행복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순간 떠오른 ‘참 행복은 선택이자 발견이요 선물이다.’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참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습니다. 눈만 열리면 행복의 발견이요 이런 행복은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눈만 열리면 온 주변에 널려있는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행복의 보물들입니다.
이런 행복의 선물을 발견할 때 비로소 참 행복한 삶입니다. 돈주고 살 수 없는 행복이요 누가 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참 행복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참 행복의 비결을 밝혀 줍니다. 오늘 복음 중 군중 속의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모든 어머니들의 심중을 대변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행복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만고불변의 행복의 비결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이런 행복은 누구나 공평히 누릴 수 있습니다. 멀리 있는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발견하는 행복의 선물입니다. 정말 이것이 참 행복입니다. 성모님 역시 행복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 역시 성모님 못지 않게 행복합니다.
성모님이 참으로 행복했던 것은 예수님 아드님을 두셨기 때문이기보다는 세상 그 누구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켰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야 말로 온생애 동안 늘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지켰던 순종의 ‘예스맨yes-man’이었습니다. 그 좋은 단적인 예가 예수 아드님 잉태시 주님 천사의 말씀에 대한 성모님의 흔쾌한 수락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성모님의 전 삶을 요약하는 고백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참 행복의 비결은 단 하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뿐입니다. 그밖에서의 행복은 곧 사라질 일시적 행복이요 영원한 참 행복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 외에서의 행복의 추구는 연목구어緣木求魚로 결국 허무虛無로 끝날 것입니다.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의 으뜸 서원인 정주서원도 바로 이런 참 행복을 목표로 합니다. 늘 하느님 안에 정주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비로소 마음의 순수요 참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수도생활은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와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어제 공부했던 사막교부, 조시마 압바의 예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말씀들은 바로 그가 호흡했던 공기였다. 축복받은 조시마는 언제나 온시간 말씀들을 읽는 것을 사랑했다. 그것은 거의 그가 숨쉬는 공기와 같았다. 그가 모든 덕의 열매를 얻는 것은 바로 이 말씀들로부터 였다.”
바로 시편 1장의 행복한 사람의 경우가 연상됩니다. 그대로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를 통한 관상의 행복을 누리는 이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는 일이 생활화되어 몸에 밴 사람을 일컫습니다. 말그대로 걸어다니는, 살아있는 성경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의 내적상태를 요엘 예언자가 잘 묘사합니다. 언제나 ‘오늘’ 바로 ‘그날’을 앞당겨 사는 말씀의 사람들입니다.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킴으로 말씀과 하나되어 살 때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내적 삶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요엘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행복은 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있습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참 행복입니다. 그러니 행복은 선택이자 발견이요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킴으로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