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사람들 -찬미, 희망, 깨어있음, 말씀실행-2017.11.12. 연중 제32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1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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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2. 연중 제32주일                                                               지혜6,12-16 1테살4,13-18 마태25,1-13



슬기로운 사람들

-찬미, 희망, 깨어있음, 말씀실행-



참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지인들이 보내 주는 한국 어디서나 아름다운 가을 풍경들입니다. “아, 거기도 아름다운 천국이네요.” 지인이 보내 준 가을 사진에 대해 드린 답신입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아름다운 하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엊그제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아마 얼마 지나면 아름다운 단풍도 사라지고 썰렁한 겨울이 시작될 것입니다. 새삼 아름다운 단풍도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죽음 있어 삶이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긴듯하지만 짧은 인생, 하느님의 아름다운 선물 인생입니다.


오늘 열 처녀의 비유 역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그 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로 시작되는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가 우리에게 화두로 주어 집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의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까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열 처녀중 다섯은 어리석었고 다섯은 지혜로웠습니다. 열 중 다섯의 슬기로운 처녀들만이 하늘 나라를 살았음을 봅니다. 모두가 하늘 나라에 초대 받은 삶이 었지만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만이 진짜 아름다운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묘사가 슬기로운 삶과 어리석은 삶의 비밀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었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가지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모릅니다. 누가 슬기롭고 어리석은지는 주님 도래할 때 환히 드러납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아무도 예기치 않은 한 밤중에 도래한 신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 성모 후렴과 아침 성무일도 즈가리야 후렴도 이와 일치합니다. 


“한밤중에 소리가 들렸도다. 신랑이 오시니 어서들 마중나가라.”

짧은 기도로 바치기 좋은 참 흥겨운 후렴 노래였습니다. 문제는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생겼습니다. 등에 기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등잔에는 기름이 있습니까? 유비무환입니다. 평상시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 결론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도 주님이 오실날을 모릅니다. 죽음이 올 날도 이와 같이 모릅니다. 하여 성 베네딕도는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하십니다. 죽음처럼 주님도 그렇게 오실 것입니다. 죽음의 문이 닫히면 이제 모든 것이 끝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깨어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열처녀들은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교회내에 불림 받은 신자라 하여 구원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구원에서 제외된 어리석은 처녀들은 생각없이, 정신없이, 영혼없이 참 바쁘게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의 절박한 심정이 가슴을 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간 나눈 대화입니다.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안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슬기로운 처녀들의 행동이 참 냉정하고 몰인정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짧은 생각입니다. 각자 등의 기름은 각자 마련해야지 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살아 온 고유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루 아침에 자란 아름드리 나무가 아니듯 평생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 온 삶인데 어떻게 나눠 줄 수 있겠습니까? 매일 점검해봐야 할 내 영혼 등잔의 기름입니다.


바로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이 슬기로운 삶과 어리석은 삶의 비밀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7,24).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7,26)


확연히 구분되는 슬기로운 삶과 어리석은 삶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슬기로운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래야 오늘 지금 여기서 아름다운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답은 단 하나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삶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참 행복의 비결은 이 하나뿐입니다. 이래야 우리 영혼 등에 넉넉히 준비된 기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너무 늦었습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에 돈이 있어도 닫힌 문을 열지 못합니다.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 할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이 닫히기 전 남은 삶을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살라 연장되는 선물같은 우리 인생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과 주님과의 대화가 또 가슴을 칩니다.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앞서의 슬기로운 처녀들에 의해 상처받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이어 주님의 말씀에 결정적 상처를 입습니다.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평생 나름대로 주님을 섬기며 살았다 생각하는 데 이런 말을 듣는 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 까요. 그대로 마태복음 산상설교 끝무렵의 말씀을 연상케 됩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마태7,21-23)는 단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이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들에게 주님의 매몰찬 반응이 충격적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7,23).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충격적 말씀입니다. 열처녀의 비유 역시 우리 모두 회개하여 슬기롭고 아름다운 하늘 나라를 살라 주어진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알고 우리 역시 주님을 아는 길은 주님을 사랑하여 말씀을 실행하는 길뿐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실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화답송 후렴처럼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래야 우리의 희망도 살아나고 깨어 살게 됩니다. 늘 생생한 희망이 깨어 준비하며 말씀을 실천하게 합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 노래할 때 얼마나 흥겨웠습니까? 오늘 아니 한주일 동안 끊임없는 노래기도로 바치기 바랍니다. 이래야 살아나는 영혼에 하느님 희망이요 말씀 실행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시편 찬미는 또 얼마나 좋은지요.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리이다. 제 영혼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러, 제 입술이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하느님 찬미가 답입니다.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의 삶이 슬기롭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오늘 여기서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합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처녀들은 이런 찬미의 삶을 소홀히 했을 것이고 하여 말씀 실행도 소홀히 했음에 분명합니다. 


찬미의 사람들은 결코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습니다. 이런 찬미가 생생한 희망 속에 삶과 죽음을 넘어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어제 성가대 피정때 하느님 찬미의 성가대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열강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사랑을 다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를 받습니다. 참 좋은 기쁨과 평화, 희망의 축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어 날로 주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모됩니다. 찬미보다 치매예방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노후의 영적복지에 하느님 찬미가 제일입니다. 끝까지 성가대 하시기 바랍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가 답입니다. 찬미가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지혜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찬미의 행복, 만남의 행복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대신 하느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너무 아름답고 은혜로와 몇구절은 그대로 인용합니다.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한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있는 지혜를 발견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자체가 완전한 예지이고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있는 자는 곧바로 근심이 사라진다.”


지혜가 답입니다. 이런 지혜를 발견해야 참 행복입니다. 지혜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직효약은 지혜자체이신 하느님뿐입니다. 지혜를 사랑하고, 갈망하고, 찾으러 일찍 일어나고, 깊이 생각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지혜를,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이들이 진정 구도자들입니다.


참으로 똑똑한 바보로 넘치는 세상입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처녀들은 참 하느님을 몰랐던 ‘무지의 사람들’을 상징하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하느님을 알았던 ‘지혜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실행할 때 우리도 주님을 닮아 바래지 않고 늘 빛나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하느님 계시기에 살 만한 세상입니다. 눈만 열리면 그 어디나 하느님 계신 하늘 나라입니다. 늘 깨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며 아름답고 슬기로운 삶을 살 때 바로 여기서 실현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기쁨을 앞당겨 살게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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