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반려자伴侶者 주님과의 행복한 삶 -깨어있음, 회개, 따름-2018.1.21. 연중 제3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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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 연중 제3주일                                                                           요나3,1-5.10 1코린7,29-31 마르1,14-20



영원한 반려자伴侶者 주님과의 행복한 삶

-깨어있음, 회개, 따름-



네 편의 제 자작시 감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21년전, 1997.4.18.에 쓴 ‘산능선’이란 시입니다.


-늘/하늘에 닿아있는/고요한 산능선들

 내 영혼/늘/하느님께 닿아있는/고요한/산능선이고 싶다-


19년전, 1999.2.28.일에 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라는 시입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의 초롱초롱 별빛 영혼으로/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 되어/님의 품안에/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황홀한 동녘 향해/마냥 걷다가/사라진 이

 첫눈 내린 하얀길/마냥 걷다가 사라져/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13년전, 2005년에 쓴 '창'이란 시입니다.


-방에 있는/TV, 그림, 사진/대부분이 군더더기/쓸데 없는 짐

 이보다 더좋은/임만드신/창문밖 하늘 풍경/살아있는 그림

 늘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방 하나만 있어도/부러울 것 없겠네-

 

바로 어제 2018.1.20.일에 쓴 ‘행복’이란 시입니다.


-함께/내다볼/창만 있다면

 함께/바라볼/산능선만 있다면

 함께/걸어볼/길만 있다면

 언제/어디서든/행복할 수 있겠다-


영원한 반려자 주님과 함께 하고 싶은 갈망이 녹아있는 시입니다. 어제 ‘기쁨과 희망’ 후원회 소식지를 읽다가 ‘반려’란 단어를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올해는 무술년, 개의 해입니다. 개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로 최근에는 애완견을 넘어서서 반려동물이라 부르며 가족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습니다.’로 시작된 글입니다.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이라 합니다. 반려자인 사람에서 동물과 식물로 반려자가 바뀌는 참 이상한 세태입니다. 반려동물 양육인구 1000만 시대, 단지 귀엽고 예쁘다는 의미의 애완동물이 아닌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사회문제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 합니다. 


반려동물에 이은 반려식물에 관한 기사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서울시 홀몸 어르신에 반려식물 보급해 우울감 해소. 시 올해 아이비, 고무나무 등 반려식물 보급, 원예치료사 방문해 지속적으로 관리, 시 도시농업 통해 건강한 일상 지원하는 반려식물의 긍정효과 확산할 것-


자연친화적 삶을 떠난 비인간화된 삶의 반영입니다. 이기적이고 가난하고 외로운 비인간화된 세태의 반영입니다. 아파트가 늘어나고 1인 가구가 확산될수록 사람은 더욱 이기적이되고 외로워지고 약해지고 가난해 지면서 치유와 위로, 평화를 향한 갈망에 반려동물과 반려식물의 수요도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참으로 불편하고 거부감을 갖게 하는 동물과 식물에 붙여진 ‘반려’라는 단어입니다. 개는 개답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을 찾아야 하고 참 반려자인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진짜 반려자는 주님과 사람 둘뿐입니다. 바로 주님과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동물이, 식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반려자를 닮아가는 데 반려동물을, 반려식물을 닮아가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참 좋은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닮아가고 참 좋은 반려자와의 우정을 통해 서로 닮아가는 고귀한 품위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여, 당신의 길을 내게 보여 주소서.”


화답송 후렴이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화답송에 응답하여 주님은 여러분에게 ‘영원한 반려자 주님과의 참 행복한 삶’이란 당신의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영원한 반려자이신 주님과의 참 행복한 삶은 얼마나 적절하고 중요한지요. 영원한 반려자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사람 반려자와의 우정 역시 함께 깊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 주님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반려자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말씀에서도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반려자임을 천명하십니다.


첫째, 깨어있으십시오.

깨어있어야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만납니다. 무엇보다 때를 아는 지혜를 지니게 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겸손한 믿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카이로스 하느님의 때입니다. 깨닫고 나면 우리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시간이요 하느님의 때,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언젠가 거기에서가 아닌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야 하는 주님이요, 살아가야 할 하느님 나라입니다. 깨어 있어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참 행복이요 이의 결정적 때가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의 복음 선포는 다음 두 구절로 요약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딘 잠든 영혼을 일깨우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는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바로 오늘 여기 지금의 때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에 이어 바오로 사도 역시 임박한 때를 예감하며 현세에 집착하지 말고 초연한 자유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나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의 때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종말론적 삶이라 합니다. 정말 이런 때의 감각을 지닌 깨어있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의 하느님의 선물이 됩니다.


둘째, 회개하십시오.

깨어있을 때 저절로 뒤따르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각자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제자리를 벗어나 있기에 제자리를 몰라 방황하기에 삶이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회개를 통해 제자리를 찾을 때 비로소 진짜 참나를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돌아 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찾는 회개는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회개없이는 겸손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우선적 자세가 하느님 향해 마음 활짝 여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향해 마음 활짝 열 때 바로 우리의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니느베 백성들의 회개는 얼마나 신속하고 기민한지요. 지체없는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우리가 회개로 악한 길에서 하느님께 돌아서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돌아서십니다.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구원체험입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이 회개의 여정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우리의 날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회개하고 돌아와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만나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셋째, 주님을 따르십시오.

회개의 구체적 실천은 주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로 불림받은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 야보고와 요한 형제가 그 모범입니다. 이들 어부들의 내적갈망을 첫눈에 포착하신 주님은 이들을 보자마자 즉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둘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이어서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주님께서 부르시자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과 참 운명적인 만남이요 결정적 회개의 순간입니다.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만나야 비로소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예전과 똑같이 갈릴래아 땅을 무대로 한 삶이지만 예전과는 완전히 바뀐 제자들의 내적 삶입니다. 고립단절된 삶에서 영원한 반려자이신 당신을 따르는 형제들의 공동체에 합류시킴으로 주님은 보이는 반려자 도반들을 선물로 주십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만약’은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복음의 어부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됐을 까요?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현재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주님의 부르심과 응답이 얼마나 큰 은총이요 복된 운명의 전환점인지 깨닫게 됩니다. 평생 살아도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고 사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회개는 부르심과 응답으로 구체화됩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이 회개의 여정이듯, 평생이 부르심과 따름의 여정입니다. 영원한 반려자이신 파스카의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주님을 따릅니다. 갈수록 영원한 반려자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이요, 함께하는 이웃 공동체 반려자들과도 깊어지는 우정입니다. 


아무리 사랑스런 동물도, 식물도 결코 우리의 반려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반려동물, 반려식물, 바로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잊었다는 반증이요, 공동체 반려자 형제자매들을 잊었다는 반증입니다.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외로워지고 약해지고 가난해져 빈인간화되었다는 반증입니다. 참 인간화의 구원은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이 아닌 영원한 반려자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답은 단 하나 우선적으로 영원한 반려자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공동체 반려자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모시는 시간이자, 서로가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 반려자들임을 새롭게 고맙게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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