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눈 -회개가 답이다-2018.1.31. 수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1815-1888)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3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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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31. 수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1815-1888) 기념일

                                                                                                                                   2사무24,3.9-17 마르6,1-6



믿음의 눈

-회개가 답이다-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제대로 ‘듣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보는 것’입니다. 어제는 문득 보며 감상感想하는 것이 관상觀想하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즘 독서할 때는 흡사 그림을 보듯 글을 본다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매일 강론을 쓰면 출력하여 집무실 게시판에 부착하고 그림을 감상하듯 봅니다.


-나에겐/감상感想이 관상觀想이다

그림을 조각을 /보고 감상하며 관상하듯

글도/보고 감상하며 관상한다

매사 모두를/보고 감상하며 관상하고 싶다-


감상이 관상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는 감상이요 관상입니다. 정말 매사 모두를 있는 그대로 보고 감상하며 관상하고 싶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 뜬 맹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마음따라 보는 눈입니다. 마음이 가려져있으면 아무리 육안이 좋아도 제대로 보기는 힘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순수해야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순수는 수도생활의 직접적 목표라면 하느님 나라는 궁극의 목표입니다. 무지, 탐욕, 질투, 교만, 분노, 슬픔 등 마음을 가리는, 마음을 눈멀게 하는 것들은 끝이 없습니다. 


하여 믿음의 눈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참 좋은 믿음의 눈을 지닐 수 있습니다. 세월 흘러 육안의 시력은 점차 약해져가도 심안의 시력, 믿음의 눈만은 계속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북콘서트에서 전직 비서관이 현직 대통령 참모들에게 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대통령이 워낙 낙천적이고 멀리 보는 분이기에 참모들이 최선을 다해서 구체적인 것들을 챙겨야겠지만, 국민을 보고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고 당당하고 신념 있게 뚜벅뚜벅 갔으면 좋겠다고 후배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워낙 낙천적이고 멀리 보는 분’이라는 말마디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정말 낙천적이고 멀리 보는 눈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믿음의 눈을 말합니다. 믿음의 눈이 밝아야 낙천적일 수 있고 깊고 넓은 시야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회개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회개를 통한 겸손이요 밝아지는 믿음의 눈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은 “믿음의 눈-회개가 답이다-”로 정했습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 끊임없이 회개해야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그대로 믿음의 눈이 밝아져 가는 ‘개안開眼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입당성가’에 이은 ‘인사’, 그리고 ‘참회’로 시작되는 매일미사가 참 고맙습니다. 전에는 미사 시작때 인사에 이어 약간의 말을 붙였지만 요즘은 곧장, “형제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참회로 시작합니다.


회개를 통해 겸손에 밝아지는 믿음의 눈이요 이래야 밝은 심안心眼으로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눈뜬 맹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 고향 사람들입니다. 선입견에 믿음의 눈이 가려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대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선입견과 편견에 믿음의 눈이 가려져 있기에 줄줄이 이어지는 의문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경우에는 기적이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기적이라고 말할 수 조차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애당초 기적도 불가능하며 알아 보지도 못하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사실 믿음의 눈만 있다면 모두가 기적이자 하느님의 선물이요, 찬마와 감사, 경탄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과 예수님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놀란 고향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이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랍니다. 이들 고향인들이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편견에 믿음의 눈이 먼 탓입니다. 참으로 회개가 절실한 이들입니다.


다윗 역시 믿음의 눈이 가려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반복되는 다윗의 죄입니다. 인구조사에 숨겨진 다윗의 교만입니다. 다윗은 인구조사를 통해 세금액수를 예상하고 병역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 숫자를 헤아려 모두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려 한 것인데 순간 하느님을 제쳐 놓은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교만에 눈 먼 다윗의 어리석은 행태입니다. 이 또한 믿음 부족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한 점은 즉각적인 회개에 있습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회개와 함께 가는 겸손이요 밝아지는 믿음의 눈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겸손도 믿음도 없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통해 깊어지는 겸손이요 점점 밝아지는 믿음의 눈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73세로 선종한 요한 보스코 성인도 얼마전에 기념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처럼 회개와 겸손의 사람, 참으로는 믿음의 눈 밝은 성인이셨습니다. 성인을 흠모하여 살레시오 수도원을 설립한 성 요한 보스코입니다. 위대한 업적을 칭송할 때 성 요한 보스코는 이와같이 대답하셨다 합니다. 성인의 겸손한 믿음을 엿볼수 있는 고백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신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그의 수호성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에 대한 다음 말씀은 바로 요한 보스코의 삶이었습니다. 겸손한 믿음과 함께 가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그의 사랑의 척도는 그가 척도없이(without measure), 즉 끝없이 사랑했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겸손한 마음과 더불어 참 좋은 사랑과 믿음의 눈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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