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기쁨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자-2018.3.3. 사순 제2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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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3.3.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7,14-15.18-20 루카15,1-3.11ㄴ-32



하느님의 기쁨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자-



순복음교회라는 교회도 있듯이 오늘 복음이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 순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지만 이보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라함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 너무나 잘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순복음 이야기의 중심은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라는 것이며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하느님의 기쁨-하느님을 닮아 하느님 자녀답게 살자’-로 정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양면을 지닌 죄인들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례받은 우리를 일컬어 ‘하느님의 자녀’라 부릅니다. 매일 평생,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을 다해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아뢰오니’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또 같은 루가복음에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이 물음이라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답입니다. 필생의 평생과제가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비의 여정’인지요. 이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없을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입니다. 세상에 죄인인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 관심의 초점은 ‘무죄한 의인’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은 그대로 죄인인 우리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양면성입니다. 외관상 작은 아들이 큰 죄인 같지만 깊이 속을 들여다 보며 큰 아들 역시 큰 죄인입니다.


자바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절대로 발본색원 죄를 추궁하지 않습니다. 무능하다 싶을 정도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자비는 자유입니다. 인격은 자유입니다.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시는 인격적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십니다. 참으로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시며, 무한히 참고 기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작은 아들의 청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무책임할 정도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 아들이 타락한 중에도 회개의 촉발점이 된 것은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추억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떠난 인간의 자유가, 방종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환상의 비극인지 처절히 깨달아 제정신이 든 작은 아들입니다. 


완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를 상실한 작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출구’는 열려있습니다.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마침내 절망의 나락에서 구원의 빛처럼 작은 아들의 칠흑같은 어둠의 내면을 밝힌 자비하신 아버지의 추억이었고 이어지는 회개입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 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감동적인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자기를 발견했을 때 참된 겸손입니다.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시오. 과거 아버지로부터 받은 따뜻한 사랑의 추억이 있었기에 이런 작은 아들의 회개입니다. 정말 누군가로부터 진정 사랑받은 추억이 있으면 결코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추억으로 회개하여 일어나 살아갈 것입니다.


작은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환대의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 이러합니다. 오매불망 작은 아들의 귀환을 기다렸던 아버지임이 분명합니다.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는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울었다는 묘사는 없지만 대성통곡 기쁨의 울음을 울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버지는 죄를 뉘우쳐 회개하는 작은 아들에게 일체의 추궁이나 꾸짖음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잔치를 명하십니다. 회개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환대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잃었던 아들을 찾음으로 하느님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 오직 회개 하나뿐입니다. 회개하여 빈 손, 맨 몸으로 와도 그 자체가 하느님께는 최고의 기쁨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도 부족할 것이 없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회개한 죄인 빼놓고는 하느님께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작은 아들 같은 죄인인 사람들에게 참 좋은 회개의 표징이 되는 말씀입니다. 거지같은 삶에서 회개를 통해 아버지를 만남으로 왕자같은 존엄한 품위를 회복한 작은 아들입니다. 이런 분위기로 미사잔치에 참여하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끊임없이 회개한 죄인들을 위해 축제의 미사잔치를 마련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작은 아들들입니다.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를 상실하고 왕자가 아닌 거지처럼 살아가는 죄인인 작은 아들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아버지의 집인 천국을 바로 옆에 놔두고 지옥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인 작은 아들들말입니다.


큰 아들 역시 죄인이요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거리상으로 가장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던 작은 아들이 내적으로는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반면, 거리상으로 가장 아버지와 가까이 있었던 큰 아들은 내적으로는 가장 멀리 있었음이 참 역설적입니다. 


아버지의 자녀로서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종처럼 살았던 참 자존감 약한 큰 아들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크게 삐진 큰 아들의 옹졸하고 편협한 적나라한 내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큰 아들의 항의와 더불어 격렬한 추궁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생각없이, 종처럼, 완벽주의자로 살아온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자비를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함께 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리 있었습니다. 아우를 ‘저 아들’이라 부르며 거리를 둡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는 이토록 큽니다.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자비를 닮아야 할 우리의 평생과제를 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일체의 화냄이나 실망감 없이 자비하신 아버지답게 큰 아들에게 호소하시는 무력해 보이기까지 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대응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저 아들’에서 ‘저 아우’로 형제임을 환기시키는 아버지입니다. 회개하여 하느님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큰 아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공은 큰 아들에게 넘겨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아들의 반응이 없습니다만 아마 회개하여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작은 아들, 큰 아들 같은 죄인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평생과제는 끊임없는 회개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 하나가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 유일한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바로 미카 예언자처럼 하느님께 보살펴 달라고,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자애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저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하여 당신 기쁨의 미사잔치에 참석한 작은 아들, 큰 아들 같은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어 날로 자비하신 당신을 닮아 당신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내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내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은총과 자비의 관을 씌워 주시는 분, 주님을!”(시편104,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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