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2018.4.7.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07,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8.4.7.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사도4,13-21 마르16,9-15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요즘 자주 강조하는 것이 무지의 병입니다. 마음의 병중 으뜸이 바로 무지의 병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의 병입니다. 모르면 알려줘도 모릅니다. 마치 불통과 불신의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무지의 벽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 믿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합니다. 평생 예수님을 모셨고 부활에 대한 언질도 들었을 텐데 이들의 반응은 철벽같은 불신입니다. 오늘 복음의 구체적 묘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통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말마디로 가득합니다. 제자들을 탓할바 아닙니다. 대다수의 반응이 이러할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을 믿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언젠가 어느 젊은이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적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예수님 부활을 믿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여러분은 즉시 확신에 넘쳐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런지요. 무지에서 기인한 불신과 완고한 마음의 벽입니다. 무지의 병을 치유하는 단 하나의 길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무지의 치유입니다. 무지의 벽은 앎의 문으로 변합니다.


제 즐겨 하는 표현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불통의 벽은 소통의 문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 얼마나 통쾌한 은총인지요.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새삼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뿐 아니라 부활신앙도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 벽을 문으로 바꿔주시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도 없고 믿음도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불신의 제자들과는 반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이들은 말 그대로 ‘활짝 열린 문’같은 모습들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이 그러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서두 말씀은 언제 읽어도 통쾌합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생전의 예수님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과 늘 함께 했기에 이런 담대함이요 온유와 겸손입니다. 평생 보고 배워 예수님을 닮았을 두 제자의 예수성심,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거침없는 행보에 전전긍긍, 방어하기에 급급한 지도자들의 반응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두 제자의 확신에 넘치는 다음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체험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담대한 확신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공부해서 이런 확신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체험에서 선물처럼 주어지는 확신입니다. 하여 저절로 양심에, 진리에 복종하는 삶을 삽니다. 생명보다 우선하는 것이 진리이신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진리에 복종할 때 마음은 활짝 열려 문이 되고 진정 자유로운 삶입니다. 어제 읽은 글도 잊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는 최고의 지식인들과 완전한 문맹인들에게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는 데(loving and knowing God)’는 동등하다. 모두가 ‘최고의 관상과 신비에, 성성의 수준(the higest levels of contemplation, mysticism and sancity)’에 이를 수 있다.


참 공감이 가는 고무적인 말씀입니다. 신학공부가 짧아도 누구나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이어 관상가, 신비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 및 무수한 성인들이 그 증거입니다. 항상 출발점은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항구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앎, 사랑의 관상, 사랑의 신비, 사랑의 성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라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용서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분열시키는 일이라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일치시키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벽을 쌓는 일이라면 하느님은 벽을 허물어 문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사람이 닫으면 하느님은 엽니다. 바로 무지하고 죄스런 인간의 본능적 반응입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방법은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뿐입니다. 무지의 병과 죄와 악을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은 파스카의 주님뿐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야 비로소 용서와 일치, 개방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여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규칙적으로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입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요 ‘열린 문’입니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안주安住하면 부패腐敗가 뒤따르고 소통의 문門은 불통의 벽壁으로 바뀝니다. 하여 끊임없는 복음 선포활동을 명하시는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각자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자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활짝 열린 담대한 복음 선포자로 변모시켜 주시어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