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의 중심 -하느님이 답이다-2018.5.25. 금요일 성 베다 베네라빌리스 사제 학자(672/673-735)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y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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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25. 금요일 성 베다 베네라빌리스 사제 학자(672/673-735) 기념일  

야고5,9-12 마르10,1-12



일치의 중심

-하느님이 답이다-



어제의 발견을 잊지 못합니다. 습관적으로 읽고 묵상하며 발견 못했는 데 산책 중 뜻밖의 발견에 참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무슨 발견입니까? ‘하느님 발견’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뜻밖에, 새롭게 발견하기는 요즘 처음입니다. 어제의 ‘하느님 맛’ 강론과 일맥상통합니다. 바로 다음 두 구절입니다.


‘창조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


참 중요한 두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입니다. 습관적으로 읽다보면 잊혀지기 쉬운 하느님입니다. 바로 이 하느님이 문제의 답이자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죄가 뭔지도 모르고 회개란 개념도 겸손이란 개념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인간과 동물, 악마와의 경계도 모호해집니다. 하느님 의식이 경계 또렷한 인간이 되어 살게 합니다. 하여 어려서부터 하느님 교육은 필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사라지고 사람 중심의 삶이 시작되자 이혼이 비일비재해졌습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하느님 믿음으로 살아가는 부모들의 삶을 롤모델로 삼아 부부 삶을 배워야 하는데 배우지도 못한 젊은 부부들입니다. 예전 강론 중 예로 들었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부부자격시험’이, ‘부모자격시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이상이지 실현가능성은 전무합니다. 평생 부부가, 부모가 되는 배움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느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강화해야할, 꾸준히 성장, 성숙해야할 하느님 믿음입니다. 자주 강론중 인용하는 노년의 품위 유지를 위한 세 필수 조건도 생각납니다.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입니다. 이 세 우선순위가 절대로 바뀌어선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첫 우선순위가 하느님 믿음이요 하느님 중심의 삶이 우선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정공동체나 수도공동체나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성소의 원리는 똑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부부란 믿음처럼,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수도성소의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믿음이 성소에 항구할 수 있도록 하는 힘입니다. 


이런 삶의 중심에 하느님 믿음이, 성소의식이 약화될 때 이혼도 수도성소의 포기도 쉽게 결정되는 것입니다. 평생 좋아서만 살 수 없는 결혼생활이요 수도생활이기에 끝까지 참아 낼 수 있게 하는 하느님 믿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여 많은 경우 좋아서보다는 믿음으로, 의무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위한 질문을 통해 예수님의 결혼관과 이혼관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부득이한 궁여지책의 허락이었고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창조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예수님은 이런 하느님의 결혼관을 그대로 견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절대적 율법조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적 명령보다는 간곡한 당부말씀으로 알아 부부일치의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여 얼마나 많이들 이혼하고 수도원을 떠나는지요. ‘연애는 황홀한 착각이요 결혼은 참혹한 이해’라는 말도, 또 판단력이 부족해서 결혼하고 인내력이 부족해서 이혼하고 이해력이 부족해서 재혼한다는 우스개 소리 같은 말도 생각이 납니다. 


참으로 은총이자 선택인 결혼성소나 수도성소는 신중히 결정되어야 함을 봅니다. 하여 젊은 부부든 노년의 부부든 노력하며 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저절로 존경스럽고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부부간의 신의와 일치를 깨는 불륜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여 저는 성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부생활 잘하고 자녀들만 잘 키워도 성공 인생에 성인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곤 합니다. 또 잘 살고 못 살고 문제를 떠나 부부가 평생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마지못해, 평생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처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예전 교회법 교수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유학중 로마에서 혼인법 마지막 강의 시 교수님이 결론처럼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교회법을 총동원하여 살 사람은 살게 해 주고 헤어질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판별 기준은 ‘교회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마음,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면 결혼생활이든 수도생활이든 끝까지 참아 견디며 살아내는 것이 좋고 하느님이 원하신 바일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다보면 변화의 희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예전에 인용했던 재미있는 부부간의 변화 내용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10대 부부는 신나게 살고, 20대 부부는 꿈속에서 살고, 30대 부부는 사랑하며 살고, 40대 부부는 싸우며 살고, 50대 부부는 미워하며 살고, 60대 부부는 불쌍해서 살고, 70대 부부는 고마워서 산다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결혼생활이나 수도생활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을까요? 서로 일치의 중심인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야고보 사도 말씀처럼 서로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고난과 끈기의 욥을,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며 솔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결혼생활이든 수도생활이든 동정독신생활이든 우리 모두에게 일치의 중심인 하느님을 바라보며 항구하고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선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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