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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10. 연중 제10주일                                                               창세3,9-15 2코린4,13-5,1 마르3,20-35



“너 어디 있느냐?”

-평생 화두-



참 재미있습니다. 결코 비교하여 우열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다 그만의 고유한 색깔이 있습니다. 그만의 자리가 역할이 있습니다. 대체불가능한 각자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똑같은 복음 묵상이라도 사제마다 다 닯습니다. 문체도 내용도 다 닯습니다. 굿뉴스에 나오는 사제들의 글을 읽으며 받는 느낌입니다.


각자 고유의 제자리입니다.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때 아름답습니다. 수도원 경내를 산책하다 보면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습니다. 시커멓게 죽은 큰 나무와 오래 전 지어놨으나 문제가 생겨 그대로 방치된 수도원 밖 큰 건물입니다. 수도원 불암산 배경에 조화를 깨는 흉물凶物과 같은 모습이 늘 볼 때 마다 눈에 거슬립니다. 정말 흉물이란 말뜻을 실감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


오늘 제1독서 창세기를 읽을 때 마다 마음에 늘 새롭게 와닿는 구절입니다. 많은 경우 이 말마디를 강론 제목으로 택했고, 오늘 역시 이 말마디를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말마디입니다. 각자 제자리를 확인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이웃 앞에서 조화를 깬 흉물凶物같은, 괴물怪物같은 삶은 아닌지 살펴보게 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


지금 여기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늘 깨어 있어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가 묻습니다. 각자의 처한 위치는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첫째, 영적전쟁중에 이 말씀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무수한 유혹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때 오늘 창세기의 이 물음과 더불어 그 상황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너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따먹지 말라는 나무열매를 따 먹었기에 사람은 두려워 숨었습니다. 바로 죄의 결과 밀려오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입니다. 사람은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변명에 있습니다. 사람에 이어 아내도 책임을 지지 않고 구구한 변명이요 핑게입니다. 자기가 없습니다. 


이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처지라면 숨지 말고, 변명하지 말고 즉시 용기를 내어 주님께 잘못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그 아내처럼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복음의 영적전쟁 치열한 예수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은, 악마와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또 노년에는 병마病魔와의 전쟁입니다. 이미 창세기에 예언된 대로입니다.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과의 영적전쟁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아마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악마와의 영적전쟁일 것입니다. 오늘 악마는 율법 학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분열시켜도 자기네들은 절대 분열하지 않습니다. 누가 봐도 성령께서 하시는 예수님의 일인데 악마의 사주를 받아 더러운 영에 들렸다고 왜곡하는 이들에 대해 예수님은 결정적 한마디로 영적 전쟁을 승리로 끝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용서를 거부하는 자, 사랑을 거부하는 자, 화해를 거부하는 자입니다. 완고하게 마음이 굳어져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요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너무나 자명히 해야 할 일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바로 이때 “너 어디 있느냐?” 상기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마음 활짝 열고 성령을 받아 들이고 성령의 인도따라 사랑하고, 화해하고,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영적전쟁중에도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말마디가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 일을 막아줄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 기도하게 할 것이며 주님과 함께 영적전쟁에 임하게 해줄 것입니다.


둘째, 삶의 허무와 무의미한 상황이나 낙심이나 절망적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구원하는 말씀이 역시 “너 어디 있느냐?”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절망적 상황도 지날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되는 환경중에 있을 때 즉시 바오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는 것입니다. 절망중에도 태양처럼 떠오르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분명 바오로의 낙심되는 상황에서 나온 말씀일 것입니다. 낙심되는 상황속에서도 “너 어디 있느냐?”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며, 또 위의 바오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아 그 어둔 상황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가능하면 주님 안에 머무는 시간을 많이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이래야 영전전쟁에 항구할 수 있고, 낙심과 절망의 상황속에서도 빨리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의 장면이 주님과 함께 하는 이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주님은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 보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참가족이 됩니다. “너 어디 있느냐?” 물음을 상기할 때 주님을 중심에 모신 공동체 모임이나 공동전례기도 때 더욱 충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늘 상기해야 할 “너 어디 있느냐?”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 있습니까?” 과연 “예 여기 있습니다.” 말하고 주님 앞에 나설 수 있습니까? 정말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제나이에 맞게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영적전쟁중 유혹에 휘둘려 자기를 잊고 지내지는 않습니까? 낙심과 절망중에 자포자기 상태는 아니십니까? 


“너 어디 있느냐?”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시며 '예수 성심 성월 6월' 예수 성심 안에 제자리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언제나 예수 성심의 사랑 안에 제자리를 잡고 정주함으로 당신의 참가족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ㄴㄷ).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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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젤로 2018.06.10 07:32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저희가 회개하고 성령의 인도따라 사랑하고 화해하고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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