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2018.6.17. 연중 제11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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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17. 연중 제11주일                                                                        에제17,22-24 2코린5,6-10 마르4,26-34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



여러분은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습니까? 있다면 여러분의 꿈은, 비전은 무엇입니까?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고귀한 품위의 인간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의 차이는 바로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의 넋두리가 생각납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때로 암담해 보이는 현실에 자연스런 넋두리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여기에 동조할 수는 없었습니다. 희망없는 절망의 자리 바로 거기가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제가 늘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다.”


정말 대죄는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절망에는 약이 없습니다. 그러나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을 때 절망을 딛고 일어 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하는 힘은 바로 꿈에서, 희망에서, 비전에서 옵니다. 하여 미래가, 희망이 없다는 분에게 저는 단호히 말합니다.


“하느님이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꿈이자 비전은, 희망은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믿는 우리 뿐 아니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제1독서의 에제키엘, 제2독서의 바오로에게도 영원한 꿈은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살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해 항구히, 열렬히,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사랑할 때 하느님 나라의 꿈은 내 살아있는 꿈이 되고 바로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됩니다. 


하여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는데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가 그리도 좋은 것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찬미로 표현되며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화답송 후렴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맛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이 우리 수도자입니다. 세상에 하느님 사랑의 찬미의 기쁨을, 찬미의 맛을, 찬미의 아름다움을, 찬미의 행복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황금의 입, 금구라는 별명을 지닌 동방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시편 예찬도 생각납니다.


“시편에서 솟아 나오는 인간의 목소리와 신적 선율의 조화만큼 영혼을 고양, 고무하고,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게 하며, 영혼을 이 세상으로부터, 육신의 속박들로부터 해방하고 관상으로 이끄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유배중 임종시 요한 금구의 마지막 감동적인 임종어도 그의 거룩한 삶 전체를 요약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흡사 분도회의,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받으소서.”라는 모토와도 흡사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 영광 받으소서.” 모토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은 그에게 놀랍고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꿈을, 희망을 보여줍니다. 바로 에제키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으리라.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언젠가 실현될 하느님 나라의 꿈을, 희망을 보여줍니다. 바로 오늘의 교회를 통해 실현되기 시작한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마침내 하느님 나라의 꿈은 예수님을 통해 결정적으로 실현됩니다. 예수님의 평생화두는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에 전력투구한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꿈은 그대로 우리의 꿈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꿈은 결코 비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평범한 일상에서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의 꿈이었습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을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에 관한 비유입니다. 비상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마음의 눈만, 사랑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이자 기적들입니다. 주님의 공동체도, 믿는 우리 각자도 저절로 자라는 씨앗처럼, 또 겨자씨처럼 빛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눈만 열리면 놀랍고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런 깨달음의 선물들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지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발명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눈만 열리면 하느님 나라의 발견, 감사의 발견, 기쁨의 발견, 행복의 발견입니다. 이런 관상가로, 신비가로 불린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지금 여기서 못살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저절로 자라는 씨앗처럼, 겨자씨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 중심의 삶이요,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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