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예수님의 참 제자인가? -추종追從의 자세-2018.7.2.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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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2.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아모2,6-10.13-16 마태8,18-22



누가 예수님의 참 제자인가?

-추종追從의 자세-



누가 주님의 참 제자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항구히, 충실히 따르는 자입니다. 버리고 떠나기가 아니라 버리고 따르기입니다. 구체적인 대상인 주님을 따르기입니다. 주님은 분명 ‘나를 믿으라.’ 하지 않고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주님은 당신 제자들을 향해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하루하루 주님을 따르는 삶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영원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입니다. 언제나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w’ 아무리 세월 흘러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주님이십니다. 영원한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가 되는 주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고백 그대로입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을 잘 따를 수 있습니까?


첫째,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의 우선적 조건이 회개입니다. 제1독서 아모스 예언자가 의도하는 바 역시 이스라엘의 회개입니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무죄한 이, 빈곤한 이, 힘없는 이, 가난한 이에 대한 무자비한 행태를 맹렬히 질타하시는 예언자의 모습은 그대로 하느님 마음을 반영합니다. 이어 권력에 의한 성폭력과 종교의 세속화를 격렬히 질타하는 예언자입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멀리가 아닌 가까이 오늘 지금 여기 내 주변부터 살피는 것입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니라 정의와 자비의 실천으로 회개의 진정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소외자나 난민, 이주민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 처신에서도 회개의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둘째, 끊임없는 내 삶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주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를 잊었기에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그 삶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성찰하여 기억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여기 역사공부를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불행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주님은 아모스이 입을 빌어 이스라엘의 죄상을 낱낱이 드러낸후 이들의 과거를 회상시킵니다.


“그런데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인들을 없애 주었다.---그리고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끈 다음, 아모리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


주님은 이스라엘에 베푸신 과거의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이런 주님의 구원사를 생생히 기억했다면 결코 악순환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똑같습니다. 초심의 자세를 잃었기에, 또 지금까지 베풀어 주셨던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었기에 스스로 자초한 불화, 불만의 삶입니다. 


하여 성서만 아니라 내 소속된 공동체와 더불어 내 삶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함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신구약 성경만이 아니라 내 공동체나 내 삶의 역사도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이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이 적절한 가르침을 줍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성서와 더불어 내 삶의 렉시오 디비나는 바로 하느님을 기억하는 일이요, 찬양 제물을 바치는 행위요, 올바른 길을 걸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끊임없이 안주가 아닌 정주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정주할 때 안주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정주처는 주님 뿐입니다. 주님 사랑안에 머물러 정주할 때 끊임없이 새롭게 살아나갈 힘을 얻습니다. 바로 주님을 따르고 싶다는 율법학자에 대한 주님의 답변에서 안주가 아닌 정주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처없이 흐르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진정한 정주처는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안에 정주할 때 그가 머무는 어디나 고향이요 선교의 대상이자 하늘 나라일 것입니다. 


결코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명의 강이 되어 흘렀던 영원한 순례자, 정주의 예수님이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60대 후반 미국에 거주하며 이곳 저곳 출장다니며 일하고 자녀들을 찾아 사랑을 나누는 독실한 신자인 제 사촌 아우와 주고 받은 카톡 내용입니다.


-“사랑의 순례자같네요!”

 “하하.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떠돌이’지요. 그래도 이곳저곳 자식들 집에 가서 머무를 수 있어 감사하지요.”-


새삼 예수님은 정처없는 떠돌이가 아닌 끊임없이 흘렀던 생명의 강, 사랑의 순례자였음을 깨닫습니다.


넷째,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삶의 원동력입니다. 오늘 제자의 청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충격적입니다. 


-제자;“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루가복음에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로 바뀝니다. 바로 영원한 비전 하느님 나라의 선포의 긴박성을 자각케 하는 충격적 표현입니다. 그처럼 주님을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이 중요하고 긴박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없는 자들을 ‘죽은 이들’이라 하는 표현도 충격적입니다. 어찌보면 하느님을 모르고 나도 모름으로, 살았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無知의 ‘죽어있는 이들’도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까?

끊임없는 회개의 사람입니다. 끊임없는 렉시오디비나의 사람입니다. 안주가 아닌 늘 주님 안에 머무는 정주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 비전의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처럼 당신을 따르는 참 제자들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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