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칼 -‘거짓 평화’에서 ‘참 평화’로-2018.7.16.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1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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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16.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이사1,10-17 마태10,34-11,1



말씀의 칼

-‘거짓 평화’에서 ‘참 평화’로-



제가 요즈음 발견한 가장 신선한 말마디는 영어, ‘ever old, ever new(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입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이, 성인들이 시공을 초월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습니다. 늘 옛스럽기에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엣스러움이 없으면 새로움도 없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늘 살아있는 현재적인 주님의 말씀들이요 성인들 같습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이야 말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습니다. 우리 마음의 부패를 막아주고 늘 새롭게 합니다. 예전에 인용했던 다윗처럼 회개한 죄인은 성인이 될 수 있어도 솔로몬처럼 부패한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음의 부패가 문제입니다. 하여 늘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말씀으로 마음의 부패를 방지함이 회개의 지혜입니다.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가장 좋은 본보기는 아마 미사일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영원히 우리를 새롭게 하는 현재적인 미사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회개가 마음의 부패를 막아주고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지니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참 강렬한 느낌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충격적 말씀입니다.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싱가폴 북미회담 이후의 과정을 보십시오. 참 평화를 위한 기나긴 여정에 들어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마음만 봐도 수긍할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통한 긴 정화과정후에 주어지는 선물같은 참평화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칼이, 말씀의 빛 자체가 분열을 초래합니다. 파괴적 분열이 아니라 참 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분열입니다.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말씀의 칼입니다. 이런 말씀의 칼 없이는 마음의 완고함과 부패는 필연입니다. 궁극에는 어둠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참으로, 불의에서 정의로, 불순에서 순수로, 즉 거짓평화에서 참 평화에 이르게 하는 말씀의 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이런 참 평화가 아니라 거짓 평화임이 분명합니다. 분도 성인의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성규4,25)는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참평화에 앞선 말씀의 칼로 우리의 거짓평화를 도려내는 주님이십니다. 


하여 강론 제목을 ‘말씀의 칼-‘거짓 평화’에서 ‘참 평화’로-’정했습니다. 녹슨 칼이 아니라 늘 반짝반짝 빛나는 진리의 칼, 생명의 칼, 사랑의 칼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의 부패를 도려내어 궁극엔 참평화를 주는 칼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에 값싼 거짓 평화를 주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을 몹시 불편케 하는 말씀의 칼입니다. 말씀의 칼임을 소스라치게 깨닫게 한 것은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약2700년전 예언자의 말씀이 여전히 새롭게 들리는 ‘말씀의 칼’같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뿐 아니라 오늘의 종교지도자들과 신자들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의 칼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의 소제목은 ‘거짓 경신례와 참된 경신례’입니다. 참된 경신례의 거부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의 삶이 통째로 빠진 거짓 경신례에 대한 거부입니다. 삶과 전례는 함께 갑니다. 생활의 전례화, 전례의 생활화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도 문제이고 전례가 없는 삶도 문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의 칼로 공격하는 바, 바로 정의와 공정의 실천의 삶이 없는 공허한 전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는 권고에 이어 ‘무엇하러 나에게 이런 제물을 바치느냐?’ 말씀하신후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말씀을 쏟아 내십니다. 새삼 잘 듣는 것이 영성생활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분도 규칙 역시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됩니다. 왜관수도원 어느 도반의 방에 걸렸던 액자의 공경하여 듣는 다는 ‘경청敬聽’이란 한자도 생각납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사야서 1장3절부터 15절까지 하느님의 솔직한 마음이 여과없이 이사야의 입을 통해 쏟아지고 있습니다. 동사 부정적 말마디들이 말씀의 칼이 되어 노골적으로 우리 마음을 불편케 합니다. ‘물렸다.’, ‘싫다.’, ‘가져오지 마라.’ ‘역겹다.’. ‘견딜 수가 없다.’, ‘싫어한다.’, ‘지쳤다.’ ‘가려 버리리라.’. ‘주지 않으리라.’ 온통 부정적 말마디들입니다.


더불어 오늘 복음의 주님의 두 말씀의 칼도 꼭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 누구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이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두 말씀의 칼입니다. 참으로 주님이신 당신을 사랑의 첫 자리에 두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만이 진정 합당한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정의와 사랑의 삶이 빠진 위선적 헛된 제물, 헛된 전례, 헛된 삶을 얼마나 혐오하시는 하느님이신지 깨닫습니다. 역시 말씀의 칼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새삼 미사전례는 하루 삶의 실천으로 확산되고 하루 삶은 미사로 수렴될 때 참된 전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 결론으로 주님은 참된 전례가 되기 위한 참된 삶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들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런 실천의 삶이 전제되어야 참평화요 참전례입니다. 결코 값싼 평화, 거짓 평화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참평화를 선물하시어 정의롭고 공정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후렴이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되리라.”(시편50,23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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