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의 발견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2018.7.18.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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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18.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이사10,5-7.13-16 마태11,25-27



하늘나라의 발견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



감사도 행복도 하늘나라도 발견입니다. 발명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감사요 행복이요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이런 발견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지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영혼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감사요 행복이요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복음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을 꾸짖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활짝 열린 눈으로 흡사 아버지를 바라보며 드리는 기도같습니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일한 감사기도이자 찬양기도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어떤 이들을 사랑하시는지 잘 드러납니다. 참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이것을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뉘어 집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과 철부지들입니다. 앞서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던 세 고을의 무지한 사람들, 그리고 바리사이와 율사들 소위 세속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추종하는 철부지 제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활짝 열어 계시하십니다. 이들에 대해 무한한 호의와 애정과 신뢰를 보이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들이 예수님께는 무한한 위로와 위안이 됐을 것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 속할 것이나 철부지들에 속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마침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 머리말에서 묘사되는 베네딕도가 목표한 것도 참된 겸손에 이른 거룩한 철부지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아버지의 집과 재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갈망하면서 거룩한 수도생활 방식을 모색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유식有識한 분이시면서도 무식無識한 사람이 되셨고, 지혜智慧로운 분이시면서도 무지無知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은둔하셨다.”


그러나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이런 철부지의 겸손한 영혼들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 속할까요? 우리의 모든 수행이 지향하는 바도 이런 순수와 겸손의 철부지 제자들일 것입니다. 바로 다음 참행복선언이 지칭하는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참으로 마음 겸손하고 순수한 영혼들에게 계시되는 아버지요 하늘나라의 신비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유일무이한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버지를 참으로 알 수 있는 열쇠도 아드님 예수님과의 깊은 일치 관계뿐임을 깨닫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라고 확언하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한 마음의 겸손과 순수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철부지들이 상징하는바 겸손과 순수의 제자들이지만 실은 이들이 진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겸손하고 순수할 때 아버지를 체험하고 아버지를 체험할 때 겸손과 순수입니다. 육신의 나이와 상관없이 주님과 일치의 삶이 겸손과 순수의 보장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분위기는 복음의 분위기와는 판이합니다. ‘아시리아’ 제국이 상징하는바 자기분수를, 자기를 모르는 교만에 눈먼 무지의 참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세 고을을 꾸짖으시던 주님의 불행선언으로 시작되는 이사야서입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주님의 도구로서 사명을 잊고 교만과 탈선으로 제분수를 잊고 제 좋을 대로 행한 아시리아에 대한 주님의 심판입니다. 아시리아가 상징하는바 그대로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느냐?”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제자리를 모르는 무지와 교만의 어리석은 사람을 상징하는 아시리아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자기중심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의 가능성입니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엄중한 심판선고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하느님의 심판이라기 보다는 교만의 어리석음으로 스스로 자초한 화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잊은 자들의 헛되고 허무한 삶의 비참한 말로를 보는 듯합니다. 문득 얼마전 읽은 가톨릭 고승高僧의 인터뷰중 짧은 영어 글귀가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습니다.


“Sucess always corrupts!(성공은 언제나 부패한다!). 공동체 삶이 그에 대한 최고의 치료제이다(Life in community is the remedy for that).”


섰다하면 넘어집니다. 잘 나갈 때 깨어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또 교만의 치유에 공동체가 참 좋은 치료제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끊임없이 일깨워 겸손하게 해주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겸손과 순수의 참 지혜롭고 거룩한 철부지들이 되어 당신을 충실히 따를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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