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예수님이 답이다-2018.7.19.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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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19.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이사26,7-9.12.16-19 마태11,28-30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예수님이 답이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는 것이 두려움과 짐스런 느낌일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움에 포위되어 사는 사람들이요 삶의 짐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여기서 제외될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여 성서에 365회 나온다는 ‘두려워마라.’는 말씀이요,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말씀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하나 제가 피정강의중 자주 던지는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하는 질문입니다. 모두가 공감하는 질문입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가 구체적으로, ‘여러분의 남편은,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의 자녀는 선물인가 짐인가?’ 적시하여 물으면 대답대신 폭소를 터뜨리곤 합니다.


이상理想은 선물이지만 현실現實은 짐입니다. 마치 하느님이 이상이라면 돈은 현실인 이치와도 흡사합니다. 사실 현실의 삶은 두렵고 힘든 짐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태반일 것입니다. 세월흘러 나이들어 갈수록 두려움과 짐도 점차 가중되는 느낌이라 많은 이들이 살아갈수록 힘들다 합니다.


여기서 뚜렷이 떠오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평생전사平生戰士, 평생학인平生學人입니다. 제가 즐겨 쓰는 두 단어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이고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의 평생전사요, 주님의 평생학인이라는 것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전사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학인이라는 것입니다. 얼마전 읽은 어느 가톨릭 고승의 인터뷰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만일 그들이 성장한다면 중요한 전기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하게 되기를 멈추면 본래의 자기가 시작될 것이다(They stop being good and start being themselves).’”


죽는날 까지 방심하지 말고 끝가지 선善 수행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수행을 멈출 때 이기적 나가 살아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날마다 자기를 버리는 수행에, 항구한 선善의 실천입니다. 아무리 잘 가꿔진 밭도 돌보지 않으면 잡초밭으로 바뀌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악마는 진공을 사랑합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입니다(성규48,1). 선善 수행에 소홀한 빈마음은 그대로 악마의 놀이터가 됩니다. 하여 참으로 타이트한 수도원의 일과표입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고 죽는 그날 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제가 즐겨쓰는 ‘싸우다 전사戰死해야 참된 전사戰士’라는 말마디입니다. 할수 있다면 사고사事故死, 객사客死, 병사病死가 아니라 공부하다 죽든지, 일하다 죽든지, 기도하다 죽던지 전사戰死하길 소망해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단호한 하나의 대답은 선물이라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갈망하는, 기도하는 영혼들에게 삶은 선물입니다. 고해苦海인생이 아니라 축제祝祭인생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기도가 참 아름답고 간절하여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 기도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수천년전 말씀이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말그대로 ‘에버 오울드ever old, 에버 니유ever new’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기도입니다. 예나 이제나 하느님을 찾는 영혼의 본질은 그대로입니다.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일입니다.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참 아름다운 시같은 기도입니다. 새삼 ‘기도하는 인간’, ‘하느님을 갈망하는 인간’으로 사람을 정의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과 구원의 위로를 주는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하느님의 시인이자 신비가인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참으로 이런 간절하고 아름다운 기도가 답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갈망하며 찾을 때 우리를 초대하시고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날 때 짐은 선물로 바뀝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우리의 심중을 대변한 이사야의 기도입니다. 삶의 짐에 힘들어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자비하신 주님의 초대요 환대입니다. 여기서 제외될 자 아무도 없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말씀 역시 고백성사시 ‘말씀 처방전’ 보속으로 많이 써드는 구절입니다. 주님의 평생전사이자 평생학인인 우리의 영원한 쉼터와 안식처는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 은혜롭고 무한한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성심의 온유와 겸손의 수련이 답입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로 바뀔 때 비로소 영혼의 평화요 안식입니다. 주님과 일치가 깊어지면서 우리의 멍에는 점차 주님의 편한 멍에로,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바뀝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의 멍에을 메고 온유와 겸손을 배울 때 삶의 짐은 삶의 선물이 됩니다. 그러니 삶의 짐에서 오는 온갖 어려움들을 온유와 겸손의 ‘수련의 계기’로, 나를 비우는 ‘비움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삶의 짐을 가볍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삶의 짐을 잘 질 수 있는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을 닮게 해 달라 기도할 일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삶은 하느님의 선물이 됩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통해 순화되고 성화되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되고 마침내 영원한 안식처이자 피신처이자 정주처인 주님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하시고 우리의 불편한 멍에는 당신의 편한 멍에로, 우리의 무거운 짐은 당신의 가벼운 짐으로 바꿔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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