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는 현실이다 -밀과 가라지의 공존-2018.7.28.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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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28.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예레7,1-11 마태13,18-30



가라지는 현실이다

-밀과 가라지의 공존-



오늘 가라지의 비유는 늘 들어도 새롭습니다. 늘 현실성을 지니는 비유입니다. 가라지는 현실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가라지없는 순수한 밀만의 세상은 환상입니다. 가라지의 원인을 밝히는 것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라지는 그대로 악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선과 악,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세상밭이요 우리 마음밭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내 자신을 들여다 보십시오. 온통 밀과 가라지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이지 않습니까?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를 보십시오.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는 밀밭같은 세상을 희구希求하지만 현실은 온통 가라지밭으로 변한 모습입니다.


“주님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서는 유다의 모든 주민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길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이와 같이 실현된다면 밀밭같은 참 좋은 세상일 것입니다. 그러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현실은 온통 가라지밭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방심하면 가라지밭으로 변하는 것은 순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거룩한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흡사 가라지밭으로 변한 듯 보입니다. 하여 삶은 전쟁이라, 영적전쟁이라 하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가라지와의 전쟁입니다.


흔히 밭농사를 ‘풀과의 전쟁’이라 칭하곤 합니다. 그냥 놔두면 곡식밭은 잡초밭이 될 것입니다. 곡식은 도저히 자랄 수 없습니다. 가꾸고 돌보지 않아도, 농약치지 않고 거름 안해도 참 줄기차고 억세게 번성하는 잡초들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잡초들을 뽑아내야 하고 심지어는 제초제도 뿌리곤 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발본색원을 말하고 무수한 혁명을 겪었고 범죄와의 전쟁을 수행했지만 여전히 왕성한 가라지의 현실, 악의 현실입니다. 


가라지를 말끔히 제거하려는 것 역시 끈질긴 유혹입니다. 폭력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라지의 원인을 캐는 것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악의 신비, 가라지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진정한 내적성장과 성숙을 위해 가라지는 필수적인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가라지가 없다면 수행의 노력도, 영적전쟁도 불필요하기에 영적성장이나 성숙은 기대할 수 없는 참 무기력한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비유중 주인과 종들과의 주고 받는 문답에서 우리는 삶의 지혜, 공존의 지혜를 배웁니다.


-종들;“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주인;“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종들;“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우리의 보편적 성급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공존의 인내가 참으로 필요한 시점입니다. 주인의 처방이 참 지혜롭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편견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누가,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어떻게 분별합니까?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히면, 또 가라지인줄 알고 뽑았더니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은총의 회개와 수행 여부에 따라 밀이 가라지로, 가라지가 밀로 변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고정불변의 밀과 가라지가 아니라, 두 가능성 모두에 열려 있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최종 판단은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는 무한히 너그럽고 자비로워야 합니다. 공존의 겸손, 공존의 인내, 공존의 지혜, 공존의 사랑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무책임한 방기도 아닙니다. '둘 다 함께 내버려 두되 부단히 밀의 세력을 강화시킴으로 가라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수행의 노력입니다. 


부단히 선의 세력을, 밀의 세력을 강화시킴으로 악의 세력을, 가라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이래야 악의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일단 선의 세력이, 밀의 세력이 확고히 자리잡으면 악의 세력, 가라지의 세력도 힘을 못씁니다. 시들어 저절로 죽기도 합니다. 밭농사를 보며 배우는 이치입니다. 그렇게 왕성하든 잡초들도 채소가 성장하여 확고히 자리잡으면 도저히 힘을 못씁니다.


하여 수도원의 일과표가 새삼 고맙습니다. 기도와 공부(성독)와 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일과표의 궤도따라 충실하고 항구한 수행의 노력이 뒤따를 때 안팎의 악의 세력, 가라지 세력은 점차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밀 세력의 강화와 가라지 세력의 약화에 항구하고 충실한 수행이 제일임을 깨닫습니다. 


가라지가 상징하는 바, 바로 무지의 악입니다. 무지의 악에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영이자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의 빛에 사라지는 무지의 어둠입니다. 주님의 힘은 말씀의 힘입니다. 말씀의 힘에 약화되는 무지의 세력, 악의 세력, 가라지의 세력입니다. 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내면의 선의 세력을 부단히 강화시켜주심과 동시에 악의 세력을 약화시켜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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