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14. 화요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1894-1941) 기념일
에제1,2-5.24-28ㄷ 마태18,1-5.10.12-14
회개의 여정
-들음, 회개, 겸손-
회개의 여정입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답입니다. 진정한 회개뿐이 답이 없습니다. 기후변화의 재앙 역시 생태적 회개의 표징입니다. 산소는 생명을 낳고 탄소는 문명을 낳았습니다. 문명의 발전에 따른 과도한 탄소의 배출이 지구온난화의 기후변화로 이끈 주범이라 합니다. 자발적 선택의 가난과 절제로 탄소의 배출을 최대한 억제하는 방법뿐이 없습니다. 온 인류의 생존을 위한 온 인류의 생태적 회개가 답입니다.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한 번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평생 회개해야 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구체적 실천뿐이 답이 없습니다. 하여 미사도 시작예식의 인사에 이어 참회와 자비송으로 시작됩니다.
대죄에는 크게 둘이 있습니다. 절망과 무시입니다. 절망은 급기야 자살에 이르고 무시는 타살에 이르게 합니다. 이 또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겸손의 회복이 답입니다. 정말 회개를 통해 겸손해져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둔, 하느님을 경외하는 영혼들은 절망도 무시도 않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진정 행복한 사람들은 회개를 통해 마음의 가난과 순수를 회복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이야 말로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춘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작은 사람들이지만 하느님 눈에 진짜 큰 사람들입니다.
이런 겸손은 특정한 사람들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에 주어진 평생과제이자 목표입니다. 물론 겸손안에는 자비, 지혜, 순수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무지無知에서 해방된 자비로운 이가, 지혜로운 이가, 순수한 이가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의 주님 말씀은 늘 들어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우리의 끈임없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군든지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이런 회개하여 자신을 낮춰 어린이처럼 된,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겸손한 사람은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삽니다. ‘사탄의 시스템’처럼 보이는 세상 한 복판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어 ‘하늘 나라의 시스템’을 삽니다. 바로 저는 기도와 공부와 노동이 조화와 균형을 이룬 수도원의 일과표를 ‘회개의 시스템’, ‘하늘 나라의 시스템’이라 일컫곤 합니다.
누가 회개한 겸손한 영혼들입니까? 누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입니까? 누가 자신을 낮춰 어린이처럼 된 사람입니까? 선입견이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전적으로 열려있는 사람들입니다. 평생 배움에 열려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여정은 겸손의 여정, 비움의 여정, 배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비워 자신을 활짝 연 겸손한 사람이 배웁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배우지 못합니다. 평생배움의 평생학인의 기본 자세 역시 겸손입니다. 진정 주님의 평생 전사의 특징도 겸손에 있습니다. 어제 어느 본당 신부와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주님의 겸손한 전사로 사세요! 주님은 늘 신부님을 사랑하시고 신뢰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수사님,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전사로 살 각오를 새롭게 하겠습니다.”-
막연한 회개의 은총이 아닙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을 전제로 합니다. 회개에 앞선 경청의 들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바로 이런 경청의 들음은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제가 볼 때 이런 경청의 모범이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참으로 이런 들음의 경청은 곧장 회개로 직결됩니다. 이런 회개로 겸손해진 에제키엘에게 선사된 환시의 주님 신비체험입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자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말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입니다. 사람이 문제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류의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하느님 망각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 없이는 회개도 겸손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에제키엘이 말씀의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우니 분명 ‘비탄과 탄식과 한숨’의 쓰디 쓴 내용의 말씀들인데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자기만족의 이기적 회개와 겸손이 아니라 이웃을 회개와 겸손으로 이끄는 말씀의 선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과 더불어의 구원이지 결코 혼자 구원은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영혼들은 작은 이들을 결코 무시하도, 업신 여기지도 않습니다. 이들을 업신여김은 바로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대죄로 직결됩니다. 주님의 엄중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이어지는 복음의 되찾은 양의 비유도 초점은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받은 작은 이들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노심초사, 자나깨나 걱정은 바로 이런 작은 이들에 있음을 봅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하느님의 관심의 초점은 잃은 양, 하나에 있음을 봅니다. 가톨릭 신문 8월 12일자 1면의 톱기사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사형, 절대 허용될 수 없다. 교황, 사형 전면 불허로 교리서 공식 수정”
바로 작은 이들에 대한 하느님 사랑을 깊이 깨달은 교황님의 결단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랑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20세기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입니다. 특히 감동적인 장면은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라는 사람을 대신하여 아우슈비츠 아사 감방에 자원한 것입니다.
“나는 가톨릭 사제다. 나는 그 사람 대신 죽기를 원한다. 나는 늙었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콜베 사제를 통해 살아난 그는 콜베 사제 순교후 53년을 살다가 1995.3.13.일 95세로 선종했다 합니다. 반면 콜베 사제는 만 47세로 순교의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는,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끊임없는 회개로 겸손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끝으로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회개와 겸손의 삶을 요약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