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의 삶 -자비와 용서가 답이다-2018.8.16.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1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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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16.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에제12,1-12 마태18,21-19,1



하늘 나라의 삶

-자비와 용서가 답이다-



여기 요셉 수도원에 30년 이상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보는 것이 하늘과 불암산입니다. 불암산 배경의 한결같고 무한한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묵상합니다. 내가 잘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은총으로 살아감을 배웁니다.


오늘도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 새삼 마음에 와닿은 ‘하늘 나라’라는 말마디입니다. 주님은 하늘 나라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구체적 처방을 내려 주십니다. 다른 모든 하늘 나라의 비유가 의도하는 바도 똑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과 뒷부분 내용이 다 일맥상통합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는 것과 무한히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를 몰라서 판단이요 단죄지 자기를 알면 알수록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또한 무한한 용서를 명령하십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됩니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 삶은 ‘용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소통입니다. 우선 내가 ‘살기위해’ 숨쉬듯이, 밥먹듯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닮습니다. 끊임없는 용서가 답입니다. 꼭 회개하여 용서가 아니라 사랑의 용서가 회개에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회개는 하느님 은총에 맡기고 자비로운 하느님처럼 그냥 용서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어제 제 강론을 들은 어느 사제와의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오늘 강론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오늘 저의 모친 축일이라서 더욱 미사 강론이 제 가슴에 깊이 와 닿았고 모친과 통화하면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세월을 헤쳐나가시는 모친께 깊은 감사로 머리를 숙였습니다.”-


사제의 진솔한 응답의 반응이 너무 고맙고 저에겐 ‘회개의 표징’처럼 신선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즉시 화답했습니다.


“참 잘하셨네요. 어머님 축일이라서 감회가 더 깊었었겠어요. 제 어머니도 오늘이 축일이랍니다. 연미사를 봉헌하면서도 어머님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계속 회개로 깨우치게 되고 가르침 받는 느낌입니다. 죽는 날까지 그럴 것 같아요. 돌아가셔서도 계속되는 회개에로 이끄는 어머님 사랑의 가르침 같아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어머니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이 지금도 끊임없이 회개를 촉발시키니 회개해서 용서가 아니라 사랑의 용서가 있어 끊임없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무한한 사랑의 추억은 계속 살아있어 끊임없는 회개를 촉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반응에 상관없이 끊임없는 사랑의 용서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무한히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무한한 용서를 받았기에 무한히 용서할 수 있는 것이요, 하느님께 무한한 자비를 입었기에 무한히 자비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무한한 용서와 자비행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사실 마음만 넓히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고 무한한 인내의 기다림이 바로 자비로운 사랑입니다. 마음을 바꿔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여,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 이게 현실이구나.’, ‘괜찮아’ 하고 받아들이면 의외로 복잡하던 문제도 쉽게 해소될 수 있습니다. 문제도 내 안에 답도 내 안에, 주님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무자비한 종은 바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바로 편협하고 옹졸하고 인색한 탐욕에 눈 먼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같습니다. 만탈렌트 탕감받은 무한한 자비를 까맣게 잊고 고작 백 데나리는 빚진 자에 대한 행태가 무자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인의 엄중한 말씀은 그대로 주님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루카복음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니 자비가 답입니다. 이런 자비행의 사람은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삽니다. 주님의 최종 결론 말씀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용서를 받기위해서 우리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주님의 기도중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의 대목 역시 이를 반영합니다. 하여 저는 용서가 되지 않더라도 용서의 지향을 가지라 권고합니다. 참으로 용서의 지향을 지닐 때 내공이 깊어져 때가 되면 주님은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자비한 종은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무지에, 탐욕에 눈 멀고 귀 먹어, 넓고 깊은 시야를 잃을 때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바로 에제키엘서의 반항의 집안이 상징하는 바가 이런 이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면 세상 곳곳에서 하늘 나라의 표징, 회개의 표징, 용서의 표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이 회개의 상징, 회개의 예표가 될 수 있었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끝내 이들 반항의 집안은 눈이 멀고 귀가 먹어 에제키엘 예표를 깨달아 회개하지 않음으로 바비론 유배의 재앙을 당하고 맙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릴 때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너를 알아감으로 비로소 주님을 닮아 자비와 용서, 지혜와 겸손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내적 ‘무지無知의 병’을 치유하시어 우리 모두 자비와 용서, 지혜와 겸손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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