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자비의 행복한 삶 -무지로부터의 해방-2018.8.19. 연중 제20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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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19. 연중 제20주일                                                                          잠언9,1-6 에페5,15-20 요한6,51-58



지혜와 자비의 행복한 삶

-무지로부터의 해방-



생명의 신비가 참 놀랍고 고맙습니다. 며칠 전 하우스 안 모종판에 심은 가을 김장할 배추 씨앗이 예쁘고 귀엽게 연록색 생명으로 싹이 터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새삼 하느님은 생명의 샘, 행복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지혜와 자비의 샘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 행복한 삶은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삶의 목표와 의미가 행복한 삶입니다. 한 번뿐이 없는 삶, 참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참 행복한 삶은 우리의 성소이자 의무요,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참으로 행복하십니까? 여러분은 참으로 자유롭습니까? 참 행복과 참 자유는 함께 갑니다. 참으로 자유로울 때 행복합니다. 


얼마전 강론 내용도 생각납니다. 모두 다 있는 데 기쁨이 없다면, 모두 다 있는 데, 평화가 없다면, 모두 다 있는 데 희망이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쁨과 평화, 희망이 있는 곳에 행복도, 자유도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지옥문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여기로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희망을 버릴지어다!”


희망 없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아무리 의식주 다 갖췄어도 희망없는 곳이, 기쁨없는 곳이, 평화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강론 쓰는 새벽 시간, 마침 고가高價의 손목시계가 며칠간 고장으로 제 기능을 못하고 멈춰 서니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아, 사람도 제 기능과 역할을 다 하지 못하면 쓸모가 없겠다.’ 하는 생각이 깨달음처럼 스쳤습니다. 참으로 희망차고 기쁘고 평화롭게 제자리에서 제몫을 다하며 죽는 그 날까지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새벽 책 한권의 표지 내용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고대 수도 교부들이 전하는 행복의 지혜-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심, 교만의 여덟가지 나쁜 생각들을 몰아낸다면 그 자리에 절제, 정결, 가난, 온유, 기쁨, 열정, 진솔, 겸손의 꽃들이, 행복과 지혜의 꽃들이 활짝 피어날 것이다.’라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 ‘무지無知의 병’입니다. 참으로 인간은 무지한, 어리석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무지의 병, 어리석음의 병보다 더 심각한 마음의 질병은 없습니다. 불가의 탐진치貪瞋癡, 탐욕, 분노, 어리석음도 무지에서 나오고, 위에서 말한 여덟가지 악한 생각들, 탐식, 간음,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심, 교만도 무지에서 나옵니다. 무지의 죄가, 무지의 병이, 무지의 악이 참 심각한 결정적 장애입니다.


참 지혜가 답입니다, 참 지혜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여 우리의 모든 수행도 결국은 지혜의 수행입니다. 지혜와 더불어 저절로 따라 오는 자비입니다. 참 행복한 삶, 참 자유로운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참으로 지혜로운 삶, 자비로운 삶입니다. 


삶의 지혜가 참 절실한 시대입니다. 지식의 정보는 넘치지만 참 지혜에는 굶주린 세상입니다. 옛 사막수도자들이나 우리 옛 조상들은 지식은 짧았어도 삶의 지혜는 넘쳤습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쓰레기 같은 정보의 지식들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 평화를 주는 참 지혜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선각자先覺者의 통찰에 공감했습니다. 길다 싶지만 인용합니다. 오늘 날 병든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담겼습니다.


-“내 친구들은 요즘 폐북 열심히 하는 사람 많아요. 하루에 몇 시간을 거기에 소모한다고 해요. 제 느낌은 그저 한 마디로 병든 사회구나, 하는 것이죠. 전부 나르시즘이죠. 폐북에 한 마디 올리고 내 친구들이 무슨 소리 하는 지 기다리는 겁니다. ‘좋아요’ 몇 개인지 들여다 보고, 댓글이 마음에 안들면 친구삭제해요. 한마디로 다 외롭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그 짓하죠. 폐북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게 아니라 자기애가 강화되는 중독현상이 생깁니다. 요즘 젊은 이들은 술도 잘 안 먹어요. 매일 그걸 들여다 보고 있어요. 새벽에 눈 뜨자 마자 들여다 보고.


우리나라는 뭐든지 극단적으로 가는 모양입니다. 소셜미디어가 사람들을 전부다 자폐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인간이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다 ‘아상我相’이라는 자기 감옥속에 사는 것은 틀림없어요.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 문화가 낳은 결과 중에 하나가 힐링과 위로를 강조하는 책들이 서점에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는 남을 위로할 생각은 안하고, 자기상처를 드러내놓고 말하고 위로받을 생각만 합니다. 나만큼 타인들도 고통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안해요. 항시 내 상처만 중요한 거죠. 우리 문화가 ‘징징대는’ 어린애 문화가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는 다 망합니다. 현실은 인간 자신이 더 성숙해지지 않으면 모두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공생의 윤리를 채택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어요.”-


구구절절, 반박의 여지가 없는 공감이 가는 현실진단입니다. 모두를 똑똑한 바보로 만들기 쉬운 소셜미디어입니다. 참으로 분별의 지혜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참 좋은 보물을 놔두고 엉뚱한 곳에서 힐링과 위로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넘치는 가짜 힐링과 위로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 힐링과 위로의 센터는 바로 주님의 교회요 수도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힐링과 위로처도 없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지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지혜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행복의 보물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행복의 발견입니다. 행복뿐입니까? 감사도 발견입니다. 지혜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행복과 감사의 하느님 선물들입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곡과 내용은 얼마나 흥겹고 힐링이 되고 위로가 됩니까? 참 아름답고 사랑스런 시편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참 좋은 주님 맛입니다. 주님 맛은 말씀 맛, 기도 맛, 진리 맛, 지혜 맛, 행복 맛 끝이 없습니다. 이 맛이 정말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주는 맛입니다. 세상맛, 돈맛, 일맛, 밥맛, 술맛, 도박맛의 중독을 해독시켜 줄 맛은 주님 맛뿐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맛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맛에 중독되지 않고 온전한 영육의 건강입니다.


“수사님, 여기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자주 듣는 물음에 우리 수도자들의 지체없는 대답은 ‘하느님 맛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광야曠野 인생여정에 세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하나는 성인聖人, 하나는 괴물怪物, 하나는 폐인廢人이다.’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맛에, 돈맛에 중독되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괴물이요 폐인이고 하느님 맛에 중독될 때의 성인 역시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해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고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참 좋은 보물이,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 지혜입니다. 어제 아침 성무일도 시편중 지혜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인간의 아낙네들이 옹글다 해도, 당신의 지혜를 받지 않으면 쓸모 없는 인간이오이다. 주여,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보내 주소서. 영광의 옥좌에서 그를 내려 주옵소서. 지혜가 나의 곁에 나와 함께 있게 하시고. 당신 뜻에 맞갖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활짝 열린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정말 우리가 추구할 바는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의인화된 지혜가 상징하는 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히브리말에서 지혜는 여성명사로 하나의 인격체로 등장합니다. 남성명사가 아니라 여성명사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지혜자체이신 주님의 여성적인, 모성적인 면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미사 잔치상에 오늘 어리석고 지각없는 무지한 우리 모두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어릭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주는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어라.”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걷게 합니다. 바로 이에 대한 자세한 해설이 오늘 복음입니다. 주님의 성체성사가 우리 믿는 이들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주님 맛, 미사 맛으로 살아가는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내 살을 마시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성체성사 사랑의 신비가 이 말씀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참 행복과 참 자유의 지혜와 자비는 주님과 일치될 때,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무지의 병의 치유에 유일한 처방의 답은 감히 미사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일치로 지혜의 은총을 깨달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구체적 지혜의 처방을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시간을 잘 쓰십시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에 취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바로 이것이 생명의 빵, 예수님을 모신 우리가 행하여야 할, 참 행복한 삶, 참 자유로운 삶, 참 지혜로운 삶, 참 자비로운 삶입니다. 무지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세상 맛의 중독으로부터 해방되어 본연의 참 나를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하나된 우리 모두가 참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화답송 시편이 너무 아름답고 은혜로와 다시 나눕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주님을 경외하여라.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은 지혜와 행복의 원천입니다. 하느님 망각에서 기인한 무지의 어리석음이 불행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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