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여정 -살아계신 주님과 늘 새로운 만남-2018.8.24. 금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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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4. 금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묵시21,9ㄴ-14 요한1,45-51



만남의 여정

-살아계신 주님과 늘 새로운 만남-



만남의 축복입니다. 삶은 만남의 여정입니다. 만남으로 이뤄져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꼴잡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거행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시간은 무엇입니까? 


바로 살아계신 주님과 늘 새롭게 만나는 시간입니다. 알게 모르게 살아계신 주님과 늘 새로운 만남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우리를 주님을 닮은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어제의 평범한 일상의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면도기에 관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면도해도 깔끔하게 되지 않고 여전히 턱 주변에 잔털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보기는 멀쩡한 면도날인데 아무리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 정성을 다해도 여전했습니다. 어제는 하다 못해 마침 남은 새 면도날로 교체하여 면도했더니 놀랍게도 말끔히, 깨끗이 정리된 얼굴입니다.


면도날은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었던 것입니다. 한참 쓰다보니 날이 무디어져 쓸모가 없이 되어 버린 면도날입니다. 아무리 좋은 칼도 갈고 닦지 않으면 무디어지고 녹슬어 못쓰게 됩니다. 소모품이 아닌 것이 소모품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갈고 닦아야 버려지지 않고 다 닳을 때까지 쓸 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불태우는 초처럼 말입니다.


소모품시대입니다. 1회용 소모품이 너무 많습니다. 마침내 사람도 소모품이 된 시대입니다. 나이들어 젊음도 미모도 사라지면 소모품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짐처럼 여겨져 버려지기도 합니다. 정년으로 현장에서 물러났다 하여 소모품처럼 생각해선 안됩니다. 예전 장상의 한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장상은 소모품이다.’


그러나 사람은 소모품이 아닙니다. 소모품이 되어서도 안되고 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소모품이 되지 않기위해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합니다. 이런 수행의 노력을 게을리 하는 순간 사람도 소모품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영원한 주님의 학생으로 죽는 그날까지 싸우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소모품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육신은 노쇠하여 탄력을 잃을 지언정 영혼이 탄력을 잃어선 안됩니다. 영혼의 탄력은 여전해야 하고 영혼의 날이 녹슬거나 무디어져서도 안됩니다. 영혼이 탄력을 잃고 무디어지고 녹슬 때는 정말 사람은 버려지는 소모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혼이 탄력을 유지하고 무디어지지 않고 녹슬지 않아 여전히 반짝반짝 빛날 때 나이에 관계없이 맑고 향기로운,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얼마전 생면 부지의 자매들로부터 반가운 말을 듣고 용기백배했습니다. 


“신부님 강론을 매일 읽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신부님 강론을 보면서 사십대 초반일 줄 알았는데 신부님을 뵙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연세든 줄을 몰랐습니다.”


육신은 다소 노쇠해져 아픈 곳은 늘어나도 영혼의 탄력은, 영혼의 날은 무디어지지 않고 녹슬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소모품이 되지 않고 녹슬지 않고 무디어지지 않기 위한 참 좋은 처방이 바로 주님과의 늘 새로운 만남입니다. 이래야 영혼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님과 만남의 렌즈를 통해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필립보의 초대에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심드렁하게 반응하던 나타나엘, 일명 오늘 축일을 지내는 바르톨로메오에게, 재차 ‘와서 보시오.’ 강권하는 필립보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나타나엘을 만난 주님의 반응입니다. 주님은 나보다 더 잘 나를 아십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 나를 발견한 나타나엘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에 감격한 나타나엘 역시 즉각적으로 주님을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구원의 만남입니다. 만남의 축복입니다. 참 사람과 참 사람, 순수와 순수의 만남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 한 번 만 있어도 보람있는 인생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백번 듣는 것보다 이렇게 살아있는 한번의 만남이 낫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아도 제대로 사람 하나 못 만나고, 주님 한 번 못 만나고 세상을 떠난 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전하겠는지요.


주님과 우연한 만남은 없습니다. 한결같이 하느님 찾은 수행에 정진할 때, 때가 되면 주님은 만남의 선물을 주십니다. 바로 나타나엘의 다음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평소 메시아를 대망待望하면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느님 말씀을 깊이 묵상해온 나타나엘이 분명합니다. 바로 시편1장의 행복한 사람을 연상케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주님을 만난 나타나엘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마음은 더욱 정화되고 성화되어 주님을 닮은 참나로 반짝였을 것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원리는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주님은 나타나엘에게 앞으로도 당신과의 만남을 예고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하느님 아버지와의 원활한 소통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유일한 하늘길이자 하늘문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은 그대로 한의 영적 체험을, 주님과의 복된 만남을 보여줍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참 좋은 영적체험을 선물하십니다. 이어지는 요한의 고백입니다.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앞당겨 체험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이런 영적신비체험을 통해 주님을 만난 요한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내적혁명의 내적변화는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만난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치유를 선사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또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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