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 -두려워하지 않는, 차별하지 않는, 열려있는 삶-2018.9.9. 연중 제23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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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9. 연중 제23주일                                                                         이사35,4-7ㄴ 야고2,1-5 마르7,31-37



참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

-두려워하지 않는, 차별하지 않는, 열려있는 삶-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이 참 좋습니다.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는 느낌입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찬양이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합니다.


“내 영혼아 하느님 찬양하라. 알렐루야---”


하느님 찬양이 답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이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찬양의 사랑, 찬양의 기쁨, 찬양의 자유, 찬양의 평화, 찬양의 개방, 찬양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찬양의 삶에 올인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원하는 바, 인류의 영원한 꿈이자 화두는 무엇일까요? 참 평화와 자유입니다. 무수한 이들이 끊임없이 평화와 자유를 찾아, 그리스도의 평화와 자유를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하여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 기도의 집, 평화의 집이라 불립니다. 수도원 한 피정집 명칭도 ‘평화의 집’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평화와 자유를 찾아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평화롭고 자유롭습니까? 하느님께서도 원하시는 바 우리의 평화와 자유입니다. 마태복음 산상설교중 참행복 선언중 다음 대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참으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평화가 없다면, 자유가 없다면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평화와 자유일 것입니다


9월9일자 가톨릭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의 1면도 서울에서 열린 ‘2018 한반도 평화나눔포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모든 평화의 출발점은 인간 존중과 사랑’, ‘가난 차별 폭력에도---우리는 평화를 꾼꾼다’라는 제하에 이은 기사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참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주님을 닮는 길뿐입니다. 평화와 자유의 주님이 답입니다.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와 자유’라 고백합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수록 평화의 사람, 자유의 사람이 됩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참평화와 자유를 위한 세가지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친히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예나 이제나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십자로를 지날 때마다 잠시 멈추어 주님 말씀을 마음 깊이 담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이 평화와 자유의 적입니다. 두려움과 불신에서 시작되는 전쟁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또 하나의 이사야서 말씀도 생각납니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


고백성사때 가장 많이 써드리는 보속 말씀 처방전 내용입니다. 주님 함께 계실 때 비로소 평화입니다. 주님 주시는 평화의 선물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뒤에는 예외 없이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주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두려움에 대한 답은 사랑뿐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내고 참평화를 줍니다. 하여 저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성구 대신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란 말마디로 바꿔 기도하곤 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와 늘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둘째,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 편애하지 않는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 때 서로간에 참평화입니다. 차별없는 환대보다 마음 밝고 기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반면 차별하는 냉대보다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무시, 멸시, 한국에만 있다는 을에 대한 ‘갑질’이란 말마디, 모두가 차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정말 대죄입니다.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정말 주님을 닮은 이들은 사람을 너나 없이 존중하고 배려합니다.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차별없는, 편애없는 평범한 존중의 사랑만으로 족합니다. 눈빛만 봐도 민감하게 알아채는 멸시나 무시, 차별감입니다. 주님은 야고보 사도를 통해 차별하지 말 것을 우리 모두에게 간곡히 권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을 살피십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하는 것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하는 것입니다. 시편 화답송도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주님은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을 꺾어 버리시네.”


주님앞에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당신의 귀한 사람들입니다. 과연 우리는 차별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지요? 성, 인종, 종교, 계급, 주택등 차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부여된 평생숙제입니다. 이어지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루카복음의 참행복 선언 1항도 생각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 친히 배경이 되어 주셔서 믿음의 부자로 살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셋째, 개방하십시오.

사랑의 개방입니다. 두려움은 닫게 하고 사랑은 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사랑의 한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에파타!”, “열려라!”입니다. 닫힌 마음이, 닫힌 귀가, 닫힌 입이 열릴 때 비로소 평화의 구원입니다. 두려움이, 차별이 우리를 닫게 합니다. 개방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묘사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듯 선명합니다. 사람들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고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서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해 주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됩니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린 순서입니다. 귀가 열려야 입도 열려 제대로 말하게 됩니다. 잘 들어야 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열려야 할 것은 닫힌 마음입니다. 마음이 열려야 잘 들을 수 있고 잘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파타!” 다 잊어도 오늘 복음중 이 말씀은 늘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귀가 입이 막혀 있다 생각할 때, “에파타!”, “열려라!” 주님 말씀을 상기하고 의식적으로 활짝 여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열림의 개방이 은총의 구원입니다. 열림의 개방도 능력입니다. 열림의 개방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마음도 귀도 입도 열려갈 때 두려움도, 차별도 없어집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주님을 만날 때 개방의 자유요 평화입니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가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주님을 만날 때 새로운 창조요, 창세기의 말씀처럼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의 실현입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 노래 후렴도 바로 오늘 복음을 잘 요약합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잘 하셨도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셨도다.”


오늘 복음을 통해, 그리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이뤄지는 은혜로운, 신바람나는 현실을 이사야 예언자가 잘 묘사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주님을 만나 활짝 열렸을 때의 내적상태를 상징합니다. 참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유토피아 천국의 실현입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할 하늘 나라의 평화와 자유, 행복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길 말고 노예상태에서의 해방은 불가능합니다. 옛날에만 노예사회가 아니라 오늘날도 더 진화된 노예사회의 연장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목의 정신을 살려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아 깨어 살지 않으면 정주사회는 알게 모르게 우리를 노예화하기 마련입니다. 


혹자는 작금의 시대를 종교 유민 시대라 합니다. 한 곳의 종교에 정주하지 못하고 이런 종교 저런 종교, 쇼핑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종교도 하나의 상품처럼 되었고 신자들은 종교소비자가 되었다 진단합니다. 하여 실망신자의 종교유민화 현상은 오늘 우리 시대의 종교가 직면한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찾아 만나지 못해 방황하는 종교소비자들인 신자들이요 종교유민화 현상입니다. 삶의 넓이에서 만나는 하느님이 아니라 삶의 깊이에서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깨어있음은 열려있음에 직결됩니다. 삶의 깊이에서 깨어 있을 때 하느님을 만나고 마음도 귀도 입도 저절로 주변에 활짝 열려 제대로 듣게 되고 말하게  됩니다. 


참으로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원하십니까? 주님은 연중 제23주일 그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1.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2.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3.개방하십시오. 사랑의 개방입니다. 답답할 때마다 “에파타!” 안으로 소리치며 마음도 귀도 입도 활짝 열어 개방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차별하지 않는, 열려있는 참평화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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