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분별의 잣대 -하느님 중심의 삶-2018.9.10.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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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10.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1코린5,1-8 루카6,6-11



사랑은 분별의 잣대

-하느님 중심의 삶-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법이, 규칙이 분별의 잣대가 아니라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닙니다. 법대로가 맞는 듯 하지만, 때로는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법대로 하면 모든 것이 간단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별 생각없이 법대로 하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살아 있는 현실입니다. 오로지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셨기에 사랑이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의미하는 바 사랑의 삶입니다. 매사 사랑이신 하느님의 눈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을 살수록 하느님을 닮아 마음의 순수입니다. 마음의 순수는 모든 수행이 목표하는 바입니다. 사랑의 수행, 마음의 순수입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자유롭습니다. 마태복음 행복선언중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사랑으로 주님을 닮아 마음이 깨끗해 질수록 자비와 지혜요 겸손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무엇이 옳고 그런지 분명해 드러납니다. 사랑의 눈은 바로 하느님의 눈입니다.


예수님과는 반대로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철저히 율법중심의 사람들입니다. 율법이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사람의 살아있는 현실은 부차적입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원칙과도 상반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봅니다. 바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체없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명령하십니다. 사랑의 용기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사랑의 삶에서 이런 용기도 나옵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마치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위로와 더불어 치유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오늘 복음과 똑같은 살아계신 파스카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바로 마음의 오그라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묵상할 때는 늘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연상됩니다. 사랑 결핍으로, 열등감으로, 자존감 부족으로, 갖가지 삶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오그라든 마음은 활짝 펴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일어나 가운데에 서자 주님은 이 적대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미 물음 안에 답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의 눈에는 너무 나 자명한 현실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법에 상대화되는 안식일법입니다. 묵묵부답 답이 없자 예수님은 즉시 치유활동에 돌입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사랑의 기적, 사랑의 치유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 사랑의 권위있는 능력의 말씀에 오그라졌던 손은 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오그라졌던 손이 활짝 펴지면서 오그라졌던 마음도 활짝 펴져 영육이 동시 치유된 사람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이 가관입니다. 이들의 사고가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 지 참 답답한 율법중심의 완고한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했다.’로 오늘 복음은 끝맺습니다. 200주년 성서의 묘사는 더욱 적나라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미친 듯이 날뛰면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했다.’ 참으로 대책없는 사람들입니다. 정작 치유받아야할 병자는 율법중심의 삶에 마음이 잔뜻 오그라져 굳어진 이 편협한 시야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참 영성의 표지는 개방성, 유연성, 신축성입니다. 사랑이 분별의 잣대가 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똑똑한 듯 하나 예수님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율법지상주의에 눈먼 무지와 교만의 사람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참으로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제1독서에서 순수한 참 나의 삶을 살 것을 충고합니다. 순수한 삶에서 사랑의 분별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맞는 적절한 충고입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누룩’이 오염과 부패를 상징한다면 누룩없는 빵은 순수함과 결백함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얻게 된 새로운 모습을 실생활에서 실현시키라는 것입니다. 곧 참된 자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없는 빵같은 존재로 파스카 축제, 미사를 봉헌하라는 것입니다. 예물기도중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여 온 마음으로 이 신비와 하나 되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이와 일치합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올바른 분별의 지혜, 사랑의 분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오그라든 몸과 마음을 활짝 펴 주시고 좋은 사랑의 분별력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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