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과 실천의 여정 -성인이 되는 길-2018.10.4. 목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Oct 0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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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4. 목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 기념일  

욥19,21-27 루카10,1-12

 

 

비움과 실천의 여정

-성인이 되는 길-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아름다운 수확의 계절이자 기도의 계절, 10월 묵주기도 성월에 걸맞는 축일입니다.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교회의 살아있는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우리에게 살 희망과 의욕을 주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확인시켜 주는 영원한 희망의 표지이자 회개의 표지, 그리고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촉구하는 성인들의 존재입니다.

 

제가 성인 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어김없이 확인하는 사실은 성인의 생몰生沒연대입니다. 저보다 적게 사셨나 많이 사셨나 비교해 보며 삶의 자세를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만 45세를 사셨고 저는 성인보다 거의 25년을 더 살았음을 생각할 때 더욱 분발하게 됩니다.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의 ‘삶의 질’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부쩍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여정’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궁극의 목적지인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하여 여정을 수식하는 단어도 참 많습니다. 순례의 여정, 믿음의 여정, 사랑의 여정, 회개의 여정, 순종의 여정, 겸손의 여정, 비움의 여정, 자유의 여정 등 끝없이 이어집니다. 

 

삶의 여정이 깊어가면서 점차 주님께 가까이 이르게 되고 주님을 닮아 성인의 되어가는 여정,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 목표입니다. 이런 각자 삶의 여정을 한 마디로 정의 하면 ‘삶의 성경책’이요, 저는 신구약 성경뿐 아니라 때때로 각자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삶의 여정을 점검해 보라고 자주 피정자들에게 권하곤 합니다.

 

예수님이후 가장 예수님을 닮은 분이라 불려지는 성인은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 등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인이기도 합니다. 제가 천주교로 개종하기전 유일하게 알았던 성인이 프란치스코 였고 유일하게 소개받고 알아 입회한 것이 베네딕도 수도회였습니다. 그러니 제 삶의 여정에 운명적 만남의 성인이 바로 약 5세기 간격으로 쌍벽을 이뤘던 성 베네딕도요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참으로 대조적이면서 서로 보완하는 두 성인을 저는 ‘산과 강’이라 칭하곤 합니다.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과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비교하면 더욱 분명히 이해됩니다. 산같은 정주의 표상, 성 베네딕도요 맑게 흐르는 강같은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산과 강’이란 짧은 자작 애송시도 생각납니다.

 

“밖으로는 산/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되뇌며 밖으로는 산같은 성 베네딕도처럼 살고 안으로는 강같은 성 프란치스코처럼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참으로 비움과 실천의 여정에 항구했던 무소유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파견되는 제자들처럼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도 그러했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실천했던 비움의 성인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존재냐 소유냐?’중 존재를 택해 주님과 일치로 참으로 투명한 삶을 사셨던, 가난한 듯 하나 실은 내적 부유와 자유의 성인 프란치스코였습니다. 말그대로 텅빈 충만의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텅빈 충만의 기쁨에서 터져 나온 하느님 나라의 선포요, 치유의 기적이자 평화의 선물이요 찬미의 노래입니다. 모든 역경을 비움의 계기로 삼았던 가난과 겸손, 평화와 찬미의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성인의 유명한 ‘태양의 찬가’를 인용합니다. 가사와 곡은 얼마나 아름답고 마음 설레게 하는 지, 저 죽으면 장례미사때 퇴장성가로 불러 달라 부탁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맘에/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부른다."

 

늘 들어도 늘 좋은 태양의 찬가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눈멀어 보이지 않는 역경중에 제자를 불러 구술하여 적게 한 태양의 찬가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카의 신비를 사셨던 불굴의 찬미의 성인, 온갖 시련중에 단련된 보석같은 영혼의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마지막 임종시 시편141장을 읊으며 선종했다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말했다 합니다. ‘희랍인 조르바’의 저자인 니코스 카잔스키스의 ‘성자 프란치스코’ 저서의 머리말 일부도 생각납니다.

 

“나에게 성 프란치스코는 사람의 본분을 다한 인간의 표본이며, 시련 또한 평화로운 투쟁으로 이겨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의무를 실천한 인물이다. 그것은 윤리나 진리 또는 아름다움보다도 더 지고한 차원의 것, 곧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이 맡기신 물질을 갈고 닦아 영혼으로 승화시키라는 본질의 의무일 것이다.”

 

저에겐 제1독서의 욥, 복음의 예수님, 오늘 기념하는 프란치스코가 시공을 초월한 영적 형제들처럼 생각됩니다. 마치 욥은 예수님의 예표같은 분,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분신같은 분처럼 말입니다. 욥의 하느님께 대한 불굴의 희망과 신뢰는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극한 상황의 시련중에도 하느님 생명의 끈, 희망의 끈, 신뢰의 끈을 꽉잡고 있는 욥입니다.

 

“아,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 구나.”(욥19,25-27).

 

참 처절한 믿음의 승리요,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욥의 불굴의 믿음, 희망의 고백입니다. 값싼 은총도, 평화도 없듯이 값싼 성덕도 없습니다. 이런 시련을 통해 비움의 여정에 항구할 때 성덕에 성인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 예외 없이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비움과 실천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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