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유롭고 겸손한, 아름답고 행복한 삶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2018.10.13.연중 제27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Oct 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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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3.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갈라3,22-29 루카11,27-28

 

 

참 자유롭고 겸손한, 아름답고 행복한 삶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

 

 

어제 일간신문중 한 기사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작년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어느 시장 집무실 벽에 걸린 ‘총욕불경寵辱不驚’이란 액자와 그 아래 ‘달항아리’에 대한 시장의 설명입니다.

 

“총욕불경寵辱不驚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제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입니다. ‘총애를 받거나 모욕을 당해도 놀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와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고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입니다. 달항아리를 놓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달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지만 어두운 곳을 밝게 합니다. 달과 같은 부드러움으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환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대로 믿는 이들의 삶의 지표로도 삼아도 좋은 생각입니다. 어제 금요강론 때 나눴던 참 자유인들이었던 옛 사막교부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진지하고 자기에게 덜 진지할수록 이런 초연함의 자유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겸손한 삶이고 이런 겸손의 여유에서 유우머도 꽃처럼 피어납니다. 사실 이런 겸손한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이라 상처받을 ‘자기ego’가 없기 때문입니다.

 

총욕불경,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이런 이들이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참 자유롭고 겸손한, 아름답고 행복한 삶-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이라 정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세례받은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재물도, 명예도, 지식도, 건강도 다 사라져도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수차례 인용했던 지금은 고인이 된 옛 신학교 시절 교수신부님의, “인간답게가 아니라, (하느님) 자녀답게 품위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답게’는 막연하지만, ‘자녀답게’는 분명합니다.”란 요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요건을 구비한 우리들입니다. 미사중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아뢰오니’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바치지 않습니까?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환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행복한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재들인 우리의 신원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가 되고 여러분은 모두 형제가 됩니다.’(제가 넣은 말).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참 아름답고 자유롭고 겸손하고 행복한 삶의 비결이, 공동체 일치의 비결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례받은 누구나 이렇게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세레성사의 은총이자 매일 미사를 통해 새롭게 확인하는 진리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세례 받았다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평생과제 수행을 통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과제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설파한 하느님 자녀로서의 이상이, 꿈이 현실화되는 것은 우리의 평생과제를 통해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그 답을 줍니다. 아주 짧은 두절로 이루어진 복음이지만 하느님 자녀로서의 참행복의 비결을 담고 있습니다.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라면 누구나 예수님같은 자식을 둔 어머니를 부러워함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군중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목소리로 부러움을 표현하자 즉각적인 예수님의 응답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바로 예수님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예수님 자신은 물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던 많은 이들을 통한 예수님의 확신을 반영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온통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에 그분의 말씀과 행위는 그대로 하느님을 반영했습니다. 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원성사原聖事라 일컫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닮아 참 자유롭고 겸손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삶도 보고 배웁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우리 역시 형제들로부터 반면교사로 삼아 매일 평생 배웁니다. 보고 배울 형제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서로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큰 거울은 주님의 거울이구요. 매일 공동전례기도 시간마다 깨어 주님의 얼굴에 자신을 비춰보며 알게 모르게 주님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기 보다는 모전자전母傳子傳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님께서 보고 배운 최고의 스승은 성모 마리아였습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예스’로 시작해 ‘예스’로 끝낸 성모님의 삶입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 한 삶이셨습니다. 주님의 수태 고지에 예스로 흔쾌히 응답하셨고, 마지막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예수님 곁에서 함께 예스로 응답하신 순종과 겸손의 비움의 어머니, 영원한 ‘예스 맨(yes-man)’ 마리아였습니다. 

 

십자가에 내리신 예수님을 안고 있는 ‘피에타의 성모님’을 잊을 자 누구이겠습니까? 새삼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습니다. 부성애와는 비교되지 않는 모성애로 하느님 사랑에 가장 근접한 사랑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유지되는 것은 성모 마리아를 닮은 무수한 어머니들의 모성애母性愛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 할 것 없이 마지막 죽음에서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원입니다. 잘 살고 못 살고는 하느님께 달려있고 그냥 끝까지 묵묵히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노년인생을 살아가는 그 삶자체가 존경스럽고 거룩한 것입니다. 

 

하여 늘 감동하는 것은 장례미사때 제대 앞에 놓여진 마지막 순종을 상징하는 관을 볼 때 입니다. ‘아, 이제 비로소 영원한 수도자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곤 합니다. 어느 분의 확신에 넘친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어떤 실수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사제로서 살고 사제로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참으로 훌륭한 분이다!”

 

참 자유롭고 겸손한, 아름답고 행복한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은 평생과제입니다. 방법은 참 단순합니다. 평생, 하루하루, 항구히 충실히 죽는 그날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이렇게 살다가 죽은 이들이 정말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매일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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