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自由의 여정旅程 -신망애信望愛의 삶-2018.10.16.연중 제28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Oct 1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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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갈라6,1-6 루카11,37-41

 

 

자유自由의 여정旅程

-신망애信望愛의 삶-

 

 

어제에 이어 반복되는 제1독서 갈라디아서 말씀은 늘 들어도 좋습니다.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성구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말그대로 ‘자유의 복음’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는 영원한 자유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참 자유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요한복음 8장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말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자유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참으로 마음 설레게 하는, 인류의 영원한 화두와 같은 두 글자 자유입니다. 자유로워 비로소 사람입니다. 자유로워 비로소 행복합니다. 자유와 행복은 함께 갑니다. 인간의 영원한 갈망이자 꿈이 자유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 생명을 주는 참 사랑입니다. 하여 저는 자유롭고 행복한 공동체 삶을 위한 세가지 사랑의 비결을 자주 피정자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1.끝까지 기다리십시오. 때가 되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러니 2.건드리지 마십시오. 3.그냥 놔두십시오.”

 

하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고 하여, 강론 제목은 ‘자유의 여정-신망애의 삶-’이라 정했습니다. 제가 때로 강론중 괄호안에 한자를 쓰는 것은 그 의미를 깊이 새기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문득 ‘희랍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스키스의 묘비명이 생각납니다. 생전에 써놨던 묘비명이라 합니다.

 

“나는 아무 거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단 세줄의 묘비명입니다. 그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제가 예전에 열 번 이상 읽은, ‘영혼의 자서전’이란 그의 책을 얼마나 애독했는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제 써놓았던 시도 생각납니다. 가을되면 한결같이 제 색깔로 익어가는 열매들입니다. 모든 가을 열매들이 다 그렇습니다.

 

-“서서히/익어가며

  제 색깔 뚜렷해 지는/가을 열매들

  사랑으로/익어가는

  가을 인생 열매도/저랬으면 좋겠다”-

 

사람 역시 사랑으로 익어가는 제 색깔의 가을 인생 열매일 때 아름답고 자유롭습니다. 새삼 자유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어느 작가의 글도 좋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이래서 독서요, 특히 렉시오 디비나 성서독서입니다. 새삼 좋은 독서의 생활화가 자유의 여정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주는지 깨닫습니다. 며칠전 히말라야 등정중 불의의 죽음으로 히말라야의 별로 잠든 김창호 대장의 생전 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산을 향한 등정의 갈망 또한 무한한 자유를 향한 갈망처럼 느껴집니다.

 

“집으로 돌아와야 등정이 완성된다. 등산이 좋은 점은 1-2등을 가리는 게 아니라 동료랑 손을 잡고 같이 정상을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자유의 인생 여정이요, 혼자만의 자유가 아니라 함께 하는 도반들과의 자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도 율법의 외적준수에 노예가 된 바리사이와, 사랑과 진실의 자유인 예수님과의 대조가 뚜렷합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비를 베풀 때 모든 것이 깨끗해질뿐 아니라 자유로워집니다. 무지의 탐욕과 사악이 우리를 눈 멀어 어리석게 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무욕의 자유입니다. 탐욕으로 몸과 맘 무거워지면 참 자유로워지기 힘듭니다. 사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의 내적분열의 위선적 사람이라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바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이 지혜롭고 진실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자선의 사랑 실천을 통해 마음의 순수와 진실이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사랑-순수-진실-지혜-자유가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제1독서의 후반부에서 신망애의 삶이 자유의 비결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할 때, 또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일 때, 참으로 자유로워지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쟁취爭取하는 자유가 아니라 신망애의 삶에 충실히 최선을 다할 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恩寵의 선물膳物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고 신망에信望愛의 삶에 정진精進할 수 있게 하십니다.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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