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문장의 주어는 누구인가? -내 삶의 성경책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2018.12.24. 대림 제4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Dec 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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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대림 제4주간 월요일                                                        2사무7,1-5.8ㄷ-12.14ㄱ.16 루카1,67-79

 

 

내 삶의 문장의 주어는 누구인가?

-내 삶의 성경책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어제 대림 제4주일 미사후 많은 분들과의 면담성사를 통해 사회의 어둔 면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원의 수도사제지만 세상 한 복판에 있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한가한 천국같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 수도원입니다. 

 

때로는 다목적용의 제 집무실이 야전사령부野戰司令部(?)같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한 형제가 이 말을 듣더니 수사님의 집무실은 야전병원 같다 했고 즉시 공감했습니다. 영적전투중 마음의 상처를 입은 분들이 면담고백성사차 자주 찾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수도자들은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現役’인 ‘주님의 전사戰士’라 칭하곤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믿는 이들 모두가 이에 해당됩니다.

 

“제 옆에서 일하던 공무원인데 과로사 했습니다. 50대 말 독신 남자분인데 일하던 도중 갑자기 쓰러졌고 응급실에 옮겼는데 의식불명 중태입니다. 또 시골 남자 동창도 회식하고 귀가중 넘어졌는데 역시 의식불명 중태입니다.”

 

울면서 성사를 본, 동료의 급작스러운 사고로 인한 충격으로 기도도 청할겸 수도원 미사에 참석한 자매입니다. 그 밖에도 세분으로부터 급사한 주변분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참 허약한 인간, 덧없는 인생입니다. 장수시대라 하지만 급작스러운 준비없는 어처구니 없는 이런저런 죽음도 많습니다.

 

참으로 천수天壽를 누리기 어려운, ‘살리는 문화’가 아닌 ‘죽이는 문화’가 만연된 세상같습니다. 하나뿐인 존엄한 품위의 인간이 소모품처럼, 대체 가능한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되는 천박하고 비정한 사회가 되고 있는 듯 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는 분도 성인의 규칙서 말씀도 생각납니다. 비단 분도 성인뿐 아니라 사막교부들의 공통적 조언입니다. 성사 보시던 한 노老 수녀님은 늘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리며 늘 ‘귀가준비’의 죽음을 생각한다 했습니다.

 

하루하루 깨어 살아야 되겠습니다. 생각없이, 의식없이, 영혼없이 되는 대로 나를 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사는 것입니다. 제 ‘행복기도문’이 참 절실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하느님도 나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세상 일에 빠져 살다가 불의의 죽음이나 사고, 불치의 병을 맞게 된다면 얼마나 허무하고 억울하겠는지요.

 

오늘 제1독서는 나탄 예언자의 ‘신탁oracle’이요, 복음은 유명한 즈카르야의 노래로 일명 ‘베네딕투스Benedictus’불려지는 ‘찬가canticle’로 가톨릭 교회가 날마다 아침성무일도 끝무렵에 부릅니다. 저녁성무일도 끝무렵에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역시 하느님께 희망을 둔 가난한 아나빔들이 부른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오늘 독서와 말씀을 대할 때는 내 삶을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나탄이 다윗에게 준 신탁의 내용을 보십시오. 다윗 삶의 역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의 나열입니다. 온통 문장들의 주어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기고만장한 다윗의 교만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다윗 삶의 문장의 주어는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밝히십니다. 내가 내 삶의 주어가 된 내 중심의 삶일 때 교만이요 감사도 없습니다. 반면 내 삶의 주어가 하느님이고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저절로 겸손이요 찬미와 감사의 삶이겠습니다.

 

‘내가 수도원에 왔다.’말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나를 수도원에 보내 주셨다’라는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셔요. 온통 하느님께서 이루신 위업에 대한 노래입니다. 문장들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찬가의 절정은 하느님께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셨는 다음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주님이 우리 삶의 문장의 주어가 될 때 주님은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오늘 말씀의 모든 동사들의 주어는 다윗이나 즈카르야 자신이 아닌 하느님이심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리 삶의 문장의 주어는 누구인지요? 

 

참으로 통탄스러운 것은 주어없는 삶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나도 잊고 생각없이 세속에 묻혀 생존에 급급하며 무지의 삶을 살다보니 그런 어처구니 없는 죽음의 결과입니다. 하느님도 없고 나도 없는 주어없는 동사들만 즐비한 무지의 삶이라면 너무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입니다.

 

하느님과 나를 알아갈 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이보다 더 중요한 평생 공부는, 평생 일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이자 목적입니다. 하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하느님과 나를 알아가는 앎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에 일치됨으로 내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내가 주어인 삶의 문장에서 하느님이 주어가 된 삶의 문장으로 전환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문장이 주어는 누구입니까? 오늘 강론 제목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답은 단 하나 하느님이십니다. 날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에 놓고 내 삶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삶은 하나의 살아있는 고유의 성경책입니다. 매일 한 페이씩 써가는 미완의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신구약성서의 렉시오 디비나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바로 내 삶의 성경책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하루하루 하느님께서 주어가 되시어 펼치시는 일을 깊이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섭리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나의 죄로 점철된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섭리를 깊이 깨달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를 알아감으로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하느님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미사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각자 하루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 주시어 하느님이 주어가 된 하루 삶의 성경책 한 페이지를 잘 쓸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내 삶의 문장의 주어가 하느님일 때 저절로 다음 화답송 시편의 고백도 나올 것입니다.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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