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權威있고 품위品位있는 삶 -하느님 중심의 삶-2019.1.15. 화요일 사부 성 베네딕도의 제자들 성 마오로와 성 쁠라치도 기념일 히브2,5-12 마르1,21ㄴ-28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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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5. 화요일      사부 성 베네딕도의 제자들

                                                                      성 마오로와 성 쁠라치도 기념일  히브2,5-12 마르1,21ㄴ-28

 

 

 

권위權威있고 품위品位있는 삶

-하느님 중심의 삶-

 

 

 

오늘 강론 주제는 “권위있고 품위있는 삶-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나오는 권위와 품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절실한 것이 권위와 품위의 삶입니다. 실추된 신뢰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듯이 한 번 실추된 권위와 품위의 회복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비상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권위와 품위를, 형제들의 권위와 품위를, 내 자신의 권위와 품위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평범하나 진짜 필요한 사랑입니다. 휴게실 책 진열장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모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는 책 제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형제들과 우리 자신의 권위와 품위는 덜 손상될 수 있습니다.

 

저는 좋은 말마디가 나오면 한자를 찾아보고 뜻을 다시 확인합니다. “권위(權威”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신, 또는 그런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었고, “품위(品位)”는 “사람이 갖춰야 할 기품이나 위엄, 품격”으로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참 인간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에 얼마나 절대적인 권위와 품위의 삶인지 깨닫게 됩니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덕목이 권위와 품위입니다. 부모다운, 선생다운, 장상다운, 신자다운, 수도자다운, 사제다운, 지도자다운, 바로 “-다운”의 삶이 권위와 품위입니다. 

 

요즘 인터넷 댓글 중 지나친 매도, 비방, 비난, 비하, 욕설을 보면 상대방의 권위나 품위에 대한 배려가 전무하다 싶은 경우가 한 둘이 아닙니다. 참으로 권위와 품위, 존중과 배려가 사라진 천박한 시대처럼 느껴집니다. 그래도 주목되는 것은 가톨릭 신자들의 권위있고 품위있어 보이는 모습들입니다. 

 

주님이야 말로 권위와 품위의 원천이듯,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야 말로 권위와 품위의 원천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성체를 모시는 사람이 천박하게 막 살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시간전례와 공동미사전례는 권위와 품위의 원천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전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사회복지사에 합격하고 취업한 자매가 하느님과 저에게 감사하는 글이고, 또 하나는 가톨릭 신학대학에 합격한 아들에 기뻐 감사하는 메시지와 저의 답글입니다.

 

-“신부님의 기도, 강복 덕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아! 장하십니다. 하느님께 감사! 자매님께 축하! 드립니다.”-

 

-“신부님, 제 아들이 서울 카톨릭 대학교 신학과에 합격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성공했네요!”-

 

이런 사소한 듯 한 격려 역시 상대방의 권위와 품위에 분명 긍정적 역할을 할 것입니다. 사실 겸손과 더불어 감사하는 삶보다 권위와 품위에 긍정적 역할을 하는 덕도 없을 것입니다. 며칠전 60대 중반에 접어든 자매님들 모임시 덕담도 생각납니다.

 

“자매님들은 4/5는 성녀가 되었습니다. 남은 생애 1/5만 정진하면 완전히 성녀가 되어 목표가 달성됩니다.”

 

모두가 유쾌한 표정으로 활짝 웃었습니다. 이 또한 각자의 권위와 품위에 좋은 긍정적 영향을 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의 원천은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권위가 바로 우리 권위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그대로 하느님 권위를 반영입니다. 가르침과 치유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참 권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으니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시자 더러운 영은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사람들은 놀라 서로 묻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 구나.”

 

얼마나 통쾌, 유쾌, 상쾌한 장면인지요! 새삼 성령의 권위, 사랑의 권위, 섬김의 권위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깊어질수록 주님을 닮아 참으로 권위있고 품위있는 사랑과 섬김과 겸손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권위와 품위의 원천이 하느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원의 영도자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권위와 품위의 롤모델입니다.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 예수님을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고, 예수님 천사들보다는 잠깐 낮아졌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쓴 존엄한 권위와 품위의 사람이 되었으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를 확증해 줍니다. 

 

오늘은 왜관수도원의 주보성인들인 성 마오로, 성 쁠라치도 기념일이고, 왜관에서는 두 수도형제(이종원 다니엘, 박진수 후밀리스)의 종신서원식이 있습니다. 성 마오로와 성 쁠라치도에 관한 그레고리오 대종의 베네딕도 전기 7장의 내용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요. 베네딕도 성인의 권위와 제자들의 겸손과 순종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기적, 사랑의 권위입니다. 

 

사부 베네딕도의 권위있는 말씀에 순종하여 물위를 달려가 물속에 빠진 쁠라치도를 다시 건져내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물위를 달려 스승에게 데려 왔고, 구출받은 쁠라치도는 물에서 끌려 나올 떼 베네딕도 아빠스님의 모피 자락을 보았다 고백합니다. 

 

베네딕도 아빠스와 성 마오로가 겸손의 경쟁을 하자 슬며시 베네딕도 아빠스의 손을 들어주는 쁠라치도의 재치입니다. 참 아름다운, 각자 고유의 권위와 품위를 지닌 스승과 제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어쨌든 스승의 권위와 제자의 복종이 하나되어 일어난 아름다운 사랑의 기적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절실한 것이 권위와 품위의 삶이요 그 비결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으면 저절로 권위와 품위도 실추, 실종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미사중 화답송 시편 8장은 온통 존엄한 품위의 인간에 대한 하느님께 감사의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권위와 품위를 회복시켜 주시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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