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聖召의 은총 -부르심과 응답-2019.1.19. 연중 제1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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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9. 연중 제1주간 토요일                                                                           히브4,12-16 마르2,13-17

 

 

성소聖召의 은총

-부르심과 응답-

 

 

오늘 복음 묵상 중 잊고 지내던 성소의 은총을 상기했습니다. 부르심의 성소는 순전히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선택하여 세례도 받고 수도자도 되고 사제도 된 것 같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의 은총이 언제나 선행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소하면 떠오르는 참 유명한 명시, 김춘수의 ‘꽃’이 생각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누구나 공감하는 시입니다. 누구나 성소에 대한 갈망이, 주님의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참 나가 되어 의미있는 존재로, 존재감있는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름없는 존재감 없는 무명無名인이 아니라 유명有名인인 되어 ‘참으로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근원적 갈망입니다.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애송시 첫연도 부르심의 성소가 언급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늘 하느님 불러 주신, 보내 주신 이 자리에서’가 성소의 은총을 드러냅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요셉수도원의 수도형제들 스스로 내가 주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불러 주셔서, 보내 주셔서 온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수도형제들의 반려견 다섯의 이름입니다. ‘미끼, 복돌이, 대림이, 아롱이, 깜순이’ 다들 이름이 써져 있는 두꺼운 겨울 옷을 입고 지냅니다. 이 반려견들 수도원에 불림받지 않았다면, 보냄 받지 않았다면 이름 없는 존재로, 존재감 없이 살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파스칼의 이 명제에 대해 유대인 랍비 여호수아 헤쉘은 말합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하느님의 자녀로, 수도성소로, 사제성소로 불림받음으로 비로소 참으로 존재하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께 불림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 갈까요? 부르심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요 우리의 복된 운명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이자 운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성소의 은총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라 나섰다.’

 

레위의 주님을 찾는 내적 갈망을 한눈에 알아 채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시지 않았다면 레위는 평생 멸시 받는 존재로, 존재감 없이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부르심의 은총에 즉각 응답하는 레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공동체에서 새로운 삶의 여정을 살게 된 레위입니다. 완전히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를 보고 비아냥 거리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 대한 주님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성소의 은총이자 신비입니다. 주님만이 아시는 성소입니다. 선입견,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무엇인가 필요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성소를 판단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르심에 대한 감사요 부르심의 의미를 찾아 주님의 뜻에 맞갖게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귀한 은총의 선물인 성소를 잘 가꾸고 돌보는 것도 우리의 당연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기에, 또 무엇인가 부족하기에, 또 무엇인가 뜻이 있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은총의 선물인 부르심에 맞갖는 자세는 겸손이요 감사입니다. 부르심의 성소가 무슨 특권인양 거들먹 거리는 교만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통해 무지에서 해방되었고 새로운 관계에, 새로운 삶의 여정에 들어섰음을 뜻합니다.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여섯째 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여기에다 하나 “주님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추가하고 싶습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의 전우애도, 학우애도, 형제애도, 우애도 삶의 여정과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지요. 주님을, 형제들을 배우고 알아가면서 깊어지는 관계 속에 참 나를 알게 되고 비로소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도 가능합니다.

 

이런 삶의 여정중에 주님은 결정적 주도권을 잡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한 두 번의 부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날마다 깨어 부르심에 겸손히 응답케 하는 말씀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 냅니다.”

 

부르심과 응답의 성소의 여정중에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끊임없는 말씀 공부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를 부단히 깨끗이 하고, 깨어 있게 하고, 깨닫게 하는 말씀의 은총이 있어, 우리는 교만하거나 환상이나 착각에 빠지지 않고, 감사하며 겸손히 기쁘게, 오늘 지금 여기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와 실천을 통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오늘 히브리서가 알려 주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만나는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런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대사제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과의 전우애, 학우애, 형제애, 우애를 깊이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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