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공동체의 세 원리 -모여라, 들어라, 행하라-2019.1.27.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2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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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7.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느헤8,2-4ㄱ.5-6.8-10 1코린12,12-30 루카1,1-4;4,14-21

 

 

 

참 좋은 공동체의 세 원리 

-모여라, 들어라, 행하라-

 

 

 

오늘 연중 제3주일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겹고 좋았습니다. 

“주여, 당신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오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살아 계신 영이요 생명이신 주님 진리의 말씀이 종파를 초월하여 주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심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색다른 신선하면서도 충격적 공동체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난생 처음 저는 어제 조계사 경내에 소재한 대한불교조계종중앙신도회 선운당 전법회관 1층에서 있었던 ‘보리수아래 신년 작은 세미나, 스님과 신부가 만나 종교와 장애를 말하다’ 모임에 참석하여, ‘가톨릭에서 보는 장애와 종교에 대해’ 약 30분간 발표를 했습니다. 너무 화기애애한 환대의 분위기가 참 편안하여 덕담을 던진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꼭 제 집에 온 듯 편안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수도원이 없었다면 아마 불교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모두 화답하여 웃었습니다. 모임 처음에 보리수 회원 뇌성마비 도현 홍현승님이 낭독한 시가 더욱 저를 편안하게 했습니다. 전문을 인용합니다.

 

- “크리스마스트리와 아기 예수로 연말을 맞이하는

 성당 마당은 미사를 마친 어린이들이 공놀이로 떠들썩하다

 그속 한 어린이가 되어 함께 뛰어다니는 신부님에게

 흐뭇한 표정으로 성모마리아께서 말씀하시네

 더 깔깔대며 놀아도 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화계사 일주문을 향해

 전동스쿠터와 올라가는 나를 보고

 오늘 머리는 만졌냐

 농담 섞인 인사를 건네는 스님에게

 저 위, 환한 미소를 지으신 미륵 부처님도 말씀하시네

 그래 그거지

 

 미사복을 입고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보다

 가사 장삼을 수하시고 염불하시는 스님보다

 성당 마당에서 공놀이 하는 신부님의 미소 속에서

 절 마당에서 장난스레 인사하는 스님 모습에서

 예수님이 보인다

 부처님을 만난다.”

 

참 따뜻한 환대의 시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 공동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종교’에 대해 간단히 발표한 수십년간 장애인들을 돌봐온 한 불자의 마지막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선행을 베풀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어제의 색다른 공동체 체험을 통해서, 또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절로 떠오른 강론 제목이 ‘참 좋은 공동체의 세 원리’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세 요소를 갖췄을 때 참 좋은 이상적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첫째, “모여라!”입니다.

우선 모여야 합니다. 진리자체이신 살아 계신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공동체 일치의 원리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중심으로 모일 때 가능합니다. 이렇게 모여 연대해야 현실의 어려움을 버틸 힘도 생기고, 내적 무너짐도 막을 수 있습니다.

 

모여야 합니다. 살기위하여 모여야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합니다. 혼자 열걸음 가는 것보다 열이 한걸음 가는 것이 진정 진보라 합니다. 어렵고 불편해도 살기위해 함께 모여야 합니다. 함께 주님 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광야인생여정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모임입니다.

 

바로 바빌론 유배가 끝나고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찾아 물 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역시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르치셨고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나자렛으로 가시어 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사도 바오로의 제2독서 말씀도 분명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코린토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했을 것입니다. 

 

좋든 싫든 좌우간 모여야 합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모여야 합니다. 모임에로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미사전례 모임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둘째, “들어라!”입니다.

듣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모임입니다.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는 분도 규칙입니다. 들음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잘 듣고 잘 말하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을 때 순종이요 겸손입니다. 잘 듣고 배우며 깨달아 갈 때 비로소 무지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미사전례 역시 말씀전례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으로 삽니다. 말씀으로 영혼이 살아야 육신도 삽니다. 바빌론에서 유배가 끝난후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 모임을 주재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율법학자 에즈라 사제입니다. 에즈라는 율법서를 읽어주고 백성은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님 하느님을 찬양하자 백성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그대로 미사전례를 상징합니다. 감격하여 울먹이는 백성을 향한 에즈라의 강론이 감동적입니다. 그대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쳐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입니다.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주님은 이처럼 거룩한 미사전례중 말씀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격려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성체와 성혈로 우리 영육의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주님께서 이 미사중 베푸시는 기쁨과 평화의 선물이야 말로 우리의 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나자렛 회당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사야서를 봉독하신 후 회당에서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이들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 졌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의 은총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들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들음은 행함으로, 이웃의 해방과 자유의 활동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셋째, “행하라!”입니다.

‘모여라!, 들어라!, 행하라!’ 이래야 온전한 살아 있는 참 좋은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얼마나 행함을 강조하십니까? 그러니 참 신자들은 그대로 말씀을 실행하는 수행자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사야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신 주님 사랑에 대한 자발적 응답이 이웃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투신의 자비행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의 영이 자비행의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주님뿐 아니라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참 좋은 복음 선포는 주님과 일치된 삶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활동의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삶의 현장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무지에 마음의 눈 먼이들을 다시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만나는 이들 모두를 해방과 자유에로 이끄는, 들은 대로 행하는 사랑이 실천이 화급한 세상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방과 자유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 공동체를 성장, 성숙하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제2독서 말씀도 행함과 직결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지체 마다 역할이 다 다릅니다.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고마움의 대상인 지체들입니다.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는 각자의 은사입니다. 상호보완의 사랑 실천을 통한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이며 개념이 아닌 실천입니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지켜주는 것이 참 사랑의 실천입니다. 분별없이 남의 자리나 영역을 넘나들지 말고 각자 소임의 제자리에서 제몫에 충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 감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수도형제들은 ‘사랑의 달인達人’입니다. 분도 성인은 규칙에서 구체적으로 형제 사랑 실천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것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낼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다.”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몸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제몫에 충실함이 아주 현실적인 평범한 사랑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사랑의 실천은, 구원의 진리는, 해방의 자유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주님은 연중 제3주일 참 좋은 이상적 공동체의 세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모여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사랑과 진리의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2.“들어라!”, 마음을 다해, 침묵중에 들려오는 영이자 생명인,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인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3.“행하라!”, 마음을 다해, 부단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랑의 수행자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참 좋은 당신 한 몸의 공동체를 이루어 주시고 끊임없이 성장, 성숙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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