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문제와 답도 내안에 있다-2019.1.30. 연중 제3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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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30. 연중 제3주간 수요일                                                                                  히브10,11-18 마르4,1-20

 

 

 

어떻게 살 것인가?

-문제와 답도 내안에 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비유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매우 긴 복음이나 그 담긴 뜻은 심오합니다. 즉각 떠오른 강론 제목은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물음이었습니다. 물어야 답도 나옵니다. 문제도 답도 내안에 있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끝 무렵의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4,9)

 

오늘 복음 말씀인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해설을 잘 들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복음의 들음에는 다음 과정이 포함됩니다. 영성생활의 토대가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들음listening’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1.실제로 그 메시지를 ‘듣는 것hearing’입니다.

2.그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understanding’입니다.

3.그 메시지를 내 삶과 ‘동화시키는 것assimilating’입니다.

4.그 메시지를 ‘행하는 것acting’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메시지를 잘 들을 때 우리는 말씀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고 변화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깨우침을 줄 뿐 아니라 위로와 치유, 격려가 되고 우리의 생각과 말고 행동도 변화시켜줍니다. 살아있는 말씀과 영혼이 만나야 영육의 전인적 건강입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초점은 씨뿌리는 사람에 있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이 상징하는 바, 예수님이자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믿는 이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줍니다. 그대로 예수님 삶의 요약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으면 생각나는 프랑스인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긴 여운을 남겨주는 소설입니다. 한 노인이 묵묵히 수십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서 사막을 낙원으로 만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인 예수님과 일맥상통하는 삶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 친히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좌절할 줄 모르는 하느님 향한 한결같은 신뢰와 낙관적 삶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삶의 환경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한결같은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할뿐 무엇을 요구하거나 피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 삼덕의 반영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문이 닫혔을 때 그 곁에 열려있는 또 하나의 희망의 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희망으로 한결같이 살아가는 자세는 얼마나 숭고한지요. 말 그대로 인간승리이자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 철학자의 삶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삶도 환경도 마음도 날씨처럼 변화합니다. 늘 순경順境만 있는 게 아니라 역경逆境의 연속도, 어둔 터널이 계속되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믿는 이들은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길바닥이든, 돌밭이든, 가시덤불이든 개의치 않고, 하나의 삶의 과정으로 알아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참으로 깊고 넓은 시야로 하느님의 섭리를 헤아립니다. 실패인 듯 하나 결국은 성공적 삶입니다. 우연같지만 필연입니다. 씨뿌리는 삶의 과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다보면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열매를 맺으니,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배의 열매를 내니 부분적으로는 실패인생 같은데 결국은 성공적 인생입니다. 

 

주님과 하나되어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다면 그 삶 자체가 성공적 인생임을 증거합니다. 저 역시 ‘씨뿌리는 사람’의 자세로 매일 강론을 씁니다.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우화로 착각한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입니다. 전반부 비유의 초점이 ‘씨뿌리는 사람’이었다면 후반부 비유의 우의적 해설의 초점은 ‘토양’입니다.

 

말씀의 씨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토양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가 좋아도 길바닥 같은 마음이라면, 돌밭같은 마음이라면, 가시덤불 같은 마음이라면 별무소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항구한 노력의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신고 배나무도 방치하면 돌배 나무가 되고, 아무리 좋은 밭도 방치하면 잡초 우거진 박토로 변합니다. 깨어 가꾸고 돌보는 수행에 항구하지 않으면 옥토와 같은 우리 마음밭도 잡초 우거진 박토가 될 수 있습니다. 하여 좋은 땅의 마음밭에 말씀의 씨가 잘 자라기 위한 항구한 공동전례기도의 수행이요, 다음과 같은 해피엔딩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깨어 하느님 찾는 수행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모두 이 중 하나에 해당될 것입니다. 문득 어제 읽은 “내가 그리는 동그라미”라는 미영순 불자의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동그라미를 그리려면 처음 떠났던 자리로 돌아와야만 비로소 마감된다.”라는 설명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각자 그리는 동그라미 인생입니다. 너무 크게도 너무 작게도 아닌 제 크기에 맞게 그리는 동그라미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과연 동그라미는 잘 그려지고 있는 지요, 제자리에 돌아와야 완성된 성공적 인생입니다. 

 

동그라미의 크기와 모양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동그라미를 완성하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하거나 잊어버리거나 그리다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어느 분은 제자리에 돌아 오는데 30년이 걸렸다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의 정주서원이 동그라미 인생을 완성하는데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좌우간 일희일비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는 일 없이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때 각자의 동그라미 인생도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동그라미 완성의 수행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히브리서가 소개하는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거룩해지는 우리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주시는 영원한 대사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씨뿌리는 삶에, 또 자기 쇄신의 수행의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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