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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10. 연중 제5주일                                                                       이사6,1-2ㄱ.3-8 1코린15,1-11 루카5,1-11

 

 

 

신神의 한 수手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

 

 

 

새벽 강론을 쓰는 집무실이 프리지아 향기로 가득합니다. 어제 뜻밖에 받은 아름다운 영혼의 선물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이런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이런 분들 하나하나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새벽 수도원 게시판에 붙은 소식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왜관수도원 소속의 노老 수도선배들의 사진입니다. 참으로 기쁘게, 친절하게, 명랑하게, 평생 순종의 아름다운 삶을 사셨던 형제들이 마지막 얼마 안남은 삶 동안 ‘거룩한 순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저에겐 이 또한 감동입니다.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선종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간절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참 성실히, 충실히 살아갑니다. 저에겐 이런 분들이 모두 성인처럼 생각됩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듯 성인聖人은, 의인義人은 수도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어제 받은 두 편의 가톡 문자메시지에 감동했습니다.

 

“매일 새벽 아침의 강론 말씀이 이렇게 달디달고 멋질 수가 없어요. 일단 읽어봐야 속이 풀리고 잠을 더 청할 수 있는 보약을 쥐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수고를 주님께서 천국에 가시는 날, 친히 마중 나오실 거예요. 저는 그리 믿고 싶어요.”

 

삶이 얼마나 절박하고 불안하면 강론 말씀에 이런 반응을 하겠는지요. 새벽부터 강론 말씀을 읽으므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와 말씀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매님이 분명합니다. 또 하나의 문자 메시지입니다.

 

“오늘은 몸울림이라는 신앙인 아카데미 영화모임에 참석하여 영화보고 토론으로 이어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참 좋은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각자 다 다른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들이 참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어제 신문에서 읽는 한 젊은 이의 인터뷰 대목도 생각납니다.

 

“수능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생각이 그거 였어요. 나도 이제 인간처럼 살아야 겠다.---불안해요. 지금도 불안해요. 한번도 불안하지 않은 적은 없었던 같아요. 그냥 불안을 데리고 사는 거죠.---삶을 간결하게 만드는 것, 내가 나라고 느끼며 사는 게 제일 바라는 거예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새벽 인터넷 기사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대학생들의 정신 건강을 다룬 내용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의 정신건강이 위험한 수준이다. 2018년 3월 전국 대학생 26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대학생의 불안 정도는 고위험 수준이 40%, 잠재적 위험 수준이 30%로 나타났다. 합치면 70%의 학생이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안한 사회,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아파서 사람이듯, 외로워서 사람이듯, 불안해서 사람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 정서입니다. 특히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답은 단 하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제 미사중 시편 화답송이 답을 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제가 자주 묘비명으로 추천해 드리는 성구입니다. 다음처럼 바꿔 불러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두려울 것 없어라.” 어찌보면 불안과 두려움은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성 아오스팅의 유명한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내 영혼이 당신 안에 머물러 있기 까지는 불안하나이다.” 

 

주님과의 만남에 앞서 우선적인 것이 주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은 주님을 찾으라는 일종의 갈망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의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해야 할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바로 이런 갈망으로 주님을 만나러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매일 수도원 제 강론에 댓글을 다는 한 형제의 글도 생각납니다.

 

“매일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오늘 하루를 사는 ‘삶의 중심’이 됩니다. 아멘”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영혼도 육신도 삽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말씀을 통해 이뤄집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답은 우리 영혼이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 모습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은 말씀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런 갈망이 있어야 주님을 만납니다. 이런 갈망의 사람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야 말로 성소의 표지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불안과 두려움은 하느님을 찾는 갈망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있는 배 두척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배에 있던 어부들,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내면 깊이의 당신 찾는 갈망까지 보셨기에 시몬의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역시 이사야 예언자와 바오로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주님은 먼저 배에 있는 시몬을 찾아 오셨듯이 하느님 역시 먼저 이사야와 바오로를 찾아 오셨고 주님의 찾아 오심에 앞서 이들의 주님 찾는 갈망이 이미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주님께서 마음속 깊이 심어주신 주님 찾는 갈망임이 분명합니다. 바야흐로 주님과의 만남이 시작된 시몬 베드로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아라.”

 

바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주님 말씀입니다. 어디가 깊은 데입니까? 멀리갈 것 없습니다. 눈만 열리면 바로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다 내 사랑과 희망의 삶의 그물을 내려 풍성한 삶의 의미를, 기쁨과 평화를,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이웃들을 담아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시몬의 대답 역시 우리의 대답처럼 공감이 갑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써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대로 시몬의 갈망이, 불안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둔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니 그대로 인생 허무의 바다에서 허무만 잔뜩 길어올렸음을 상징합니다. 그 마음 얼마나 허전하고 공허했겠는지요. 인생 말년 이런 심정의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고했는데 살의 그물에 가득 걸린 것은 허무뿐이라는 것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렛의 고백에 시몬은 내심 깊이 공감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님은 찾아 오셨고 주님을 만난 시몬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주님뿐입니다. 주님 말씀에 겸손히 순종했을 때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순간 베드로는 우리가 주일 미사후 낮기도를 대신해 바치는 다음 시편 성구에 깊이 공감했을 것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로다.”

 

주님과 시몬의 만남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물고기의 기적에 눈이 열린 시몬 베드로가 주님을 알아 본 것입니다. ‘스승님’이란 호칭이 ‘주님’으로 바뀝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죄 많은 참 나를 발견한 시몬 베드로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남으로 죄많은 나를 만남이 구원입니다. 우리 영혼의 거울인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나는 나의 참 모습입니다. 회개의 순간이자 참 나를 발견하는 겸손의 시간입니다. 

 

이런 것을 구원의 원체험이라 합니다. 평생 살아있는 생생한 추억이 되어 시몬 베드로를 늘 감사와 기쁨으로 깨어 살게 한 원체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평생 살아도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해 참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완전히 헛 산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 나를 살아 보라고 세상에 온 우리들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주님과의 만남이 끝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주님을 따름으로, 파견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의 삼총사 제자들이 된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참 보물 주님을 만나니 모두가 쓰레기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말그대로 자발적 가난의 선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이런 철저한 외적 포기가 아니더라도 예전의 그는 아닐 것입니다. 여전히 예전 삶의 그 자리에서 소유속에 살아도 소유물의 주인이 되어 이탈과 초연의 자유를 누리며 살 것입니다. 대부분은 이런 성소로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나를 찾아 구원된 시몬의 심정은 바로 행복기도에 나오는 그대로 였을 것입니다.

 

“주님/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저의 사랑/저의 기쁨/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주님을 만나 완전히 새로난, 참 나를 찾은 바오로의 겸손한 고백도 감동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미사에 참석한 우리 역시 바오로처럼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고백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오로에 이어 이사야의 주님과의 만남은 얼마나 극적인지요. 미사중 감사기도후 “거룩하시다”는 바로 여기에서 기원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 하도다.”

 

그대로 오늘 이사야의 주님과 만남의 장면이 미사의 축소판 같습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참 나를 발견한 이사야의 모습이 시몬 베드로, 바오로보다 더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이어 주님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이사야의 입에 대고 말합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주님을 만남으로 완전히 정화되고 성화되어 하느님의 참 사람이 된 이사야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런 원체험은 평생 이사야의 선교활동에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말씀에 흔쾌히 파견에 응답하는 참 멋진 이사야입니다. 역시 주님과의 만남은 파견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하여 주님을 만난 우리 모두의 파견에 앞선 고백입니다. 이사야, 시몬 베드로, 바오로가 ‘신의 한 수’ 였듯이, 우리 모두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닌 ‘신의 한 수’같은 필연적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난 우리 모두가 당신과 함께 복음 선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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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안젤로 2019.02.10 09:37
    "주여, 당신은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시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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