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도반이자 반려자 -주님과의 우정-2019.2.14.목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827-869)와 성 메토디오 주교(815-885)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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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14.목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827-869)와 성 메토디오 주교(815-885) 기념일

창세2,18-25 마르7,24-30

 

 

 

참 좋은 도반이자 반려자

-주님과의 우정-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최소한 둘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는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연인이든 부부든 친구든 혼자보다는 둘이 함께 하는 모습이 보기도 좋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9세기 “슬라브의 사도들”이라 칭하는 성 치릴로와 성 메테디오 두 형제 도반의 모습도 보기 좋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저녁식사후 산책하며 묵주기도 하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다들 함께 하는 데 간혹 홀로 떨어져 묵주기도를 하던 신학생을 볼 때는 웬지 어색해 보였던 느낌도 잊지 못합니다. 1인가구가 점차 늘어나는 시대에 혼자 먹는 밥, 혼자 먹는 술이라 해서 혼밥, 혼술이란 괴이怪異한 신조어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창세기의 서두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이나 우리 인간의 마음이나 느끼는 바는 비슷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이어 하느님은 빚어 만드신 생물을 사람에게 데려왔고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는 데,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합니다.

 

협력자란 말마디에 주목합니다. 공동성서에는 짝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반려자, 또는 도반이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데 짝을, 협력자를, 반려자를, 도반을 찾지 못해 혼자 외롭게 지내는 이도 많습니다. 

 

짝을 실감하는 것은 두발과 두손, 신발이나 양말, 장갑일 것입니다. 한쪽 발이나 한쪽 손을, 한쪽 신발이나 양말, 장갑을 잃어 버렸을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한쪽 무릎이 불편하니 건강했을 때 한쌍의 다리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뒤늦게 깨닫습니다.

 

반려자와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둘이자 하나요 하나이자 둘인 관계입니다. 요즘은 집에서 키우고 돌보는 개나 고양이도 반려동물이라 하고 집에서 키우는 식물도 반려식물이라 칭하곤 합니다. 과연 반려동물이, 반려식물이 사람 반려자를, 협력자를 대치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소통의 한계로 인한 외로움은 계속 깊어 갈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 왔을 때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반려자를, 짝을, 협력자를 찾는 인간의 근원적 갈망을 봅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완전히 둘이자 하나인 부부관계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의 외로움은 짝을 찾는 갈망의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짝을 반려자를 찾습니다. 짝을 찾기 전에는 여전히 외로운 반쪽인생일 것입니다. 

 

보이는 부부짝도 친구짝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도반도, 영원한 협력자도, 영원한 반려자도 없습니다. 결국은 혼자 남게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부든 친구든 살아 있는 사람 협력자는 반려자는 짝은 도반은 필수입니다. 이래서 공동생활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서로에게 도반이 되고 협력자, 반려자가 됩니다. 

 

여기서 사람 도반, 협력자, 반려자와 더불어 강조하는 것이 영원한 도반이자 반려자인 주님입니다. 하여 사람 도반과 더불어 주님과의 우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도반인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사람 도반들 다 떠나도 언제나 남아 있는 도반이 주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페니키아 여자는 믿음으로 영원한 도반인 주님을 만났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로 인해 찾게 된 영원한 반려자이자 도반이신 주님입니다. 주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얼마나 컸던지 두분의 대화를 통해 감지됩니다. 두분간에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주님께 대한 페니키아 여자의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이 감동적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비움과 겸손의 절정입니다.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이 감동하신 주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시어 더러운 영에 들렸던 딸은 치유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마 페니키아 여자와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은 평생 지속됐을 것입니다. 어찌 이런 구원체험을 주신 평생 은인, 주님을 잊을 수 있을런지요. 

 

부부든 친구든 보이는 사람 도반과의, 반려자와의 우정에 절대적인 것이 영원한 도반이자 반려자인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웬지 불안하고 불완전한 사람간의 우정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담이 하와가 죄를 지어 서로의 신뢰 관계가 무너진 것도 영원한 반려자 주님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사람 도반과의 사랑에 대해 쓴 시가 생각납니다.

 

-“사랑은/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깊어지는 사랑/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함께 해도 주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을 지닌 도반과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자 공동체의 중심인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보이는 반려자와의 우정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의 형제들이 이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끊임없는 공동전례기도가 영원한 반려자이자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은 물론 보이는 반려자이자 도반인 형제들간의 우정도 깊이해 줍니다. 어제 읽은 짧은 시도 생각납니다.

 

“보고 또 보아도 보고 싶은 산/가고 또 가도 가고 싶은 산”

 

산 대신 영원한 도반 주님을 넣어, “보고 또 보아도 보고 싶은 분/가고 또 가도 가고 싶은 분” 읊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제 자작시 하늘과 산 역시 영원한 반려자이자 도반과의 관계를 말해 줍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1997.2

 

22년전 1997년 이때쯤 쓴 시인데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가 되었습니다. 하늘이신 영원한 도반과의 우정을 소망하며 쓴 시입니다. 또 제가 좋아하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류시화 시인의 시도 생각납니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을 흘러서/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예전 법정 스님이 극찬했던 시입니다. ‘보고 또 보아도 보고 싶은 분’, ‘곁에 있어도 늘 그리운 분’,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자 반려자인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생각하며 썼던 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또 하나의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며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오늘 화답송 후렴,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도 영원한 도반이자 반려자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행복의 비결임을 가르쳐 줍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자 반려자인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시간, 반쪽인 우리가 주님과 온전히 하나되는 시간입니다. 이런 반석같은 주님과의 우정위에 건설되는 보이는 도반들과의 ‘우정의 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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