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인내, 회개, 지혜-2019.2.18. 연중 제6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1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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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18.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창세4,1-15.25 마르8,11-13

 

 

 

“어떻게 살 것인가?”

-인내, 회개, 지혜-

 

 

 

요즘 제1독서 창세기 말씀이 현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대로 반복되는 오늘날의 어둔 인간 현실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저절로 자문하게 됩니다. 지난 번 제1독서 창세기가 ‘인간의 죄와 벌’에 대해 다뤘다면 오늘은 아담의 아들, 카인과 아벨이 중심인물로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자손에게 유전되는 느낌입니다. 문득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라는 소설 이름도 생각납니다.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같습니다. 카인과 아벨, 의좋은 형제로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지요.

 

문제의 발단은 하느님께 바친 제물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바친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 지고 카인 자신의 제물은 거부되었을 때 카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지요? 마침내 카인은 불타오르는 질투심에 아벨을 죽였고 아벨은 영문도 모르는 채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카인도 아벨도 모두 우리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죄로 물든 적나라한 인간 현실을 보여줍니다. 카인같은 살인자들도 아벨같은 억울한 피해자들도 인류 역사를 통해 아니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안의 카인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투로 분노로 탐욕으로 살인을 저지른 이들도 있고 마음 속으로 살인한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카인이기도 합니다. 과연 내가 카인의 위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자문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선 참았어야 했습니다. 인내가 답입니다. 질투심은 우리를 눈멀게 합니다. 카인은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대하든 하느님의 뜻은 알 수 없으니 끝까지 인내하며 자신의 본분만 다했으면 됐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창세기는 카인을 반면교사로 삼아 어떤 처지에서든 끝가지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인내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어제 화답송 후렴이었는데, 카인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였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했다면 질투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자신의 품위를 지켰을 것입니다. 카인의 질투로 인한 순간적 살인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는 지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처럼, 카인도 저주 받아 정주의 자리에서 추방되어 정처없이 세상을 떠도는 자가 되지 않습니까? 이제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음 같은 ‘살아있는 지옥’의 삶입니다. 오늘날도 범죄로 인해 아벨같은 억울한 죽음들도 또 카인처럼 살아있는 지옥을 사는 이들도 얼마나 많을까요? 살인자 카인에게도 하느님의 자비하신 보호는 약속됩니다만 남은 떠돌이 인생은 그대로 지옥같은 삶이었겠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심정은 또 어떻겠습니까? 아벨은 죽었고, 카인은 쫓겨 났으니 졸지에 두 아들을 잃었으니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평생 안고 살아갈 상처는 얼마나 컸겠는지요. 마지막 구절이 감동적입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참 힘든 아픔과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아담의 하느님 믿음이, 또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희망을 선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감동입니다. 세상의 축소판과도 같은 오늘 창세기의 생생한 내용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살아있는 모두에게 영원히 미칩니다. 살인자 카인같은 이들도 이제부터는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최선을 다해 끝까지 인내하며 살아야 하고, 아담부부같은 이들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인내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아담-하와 부부에게 새 희망으로 세 번째 아들 셋을 선물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입니다. 부질없는 가정법이지만 카인이 질투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며 아벨과 의좋은 형제로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바로 우리는 카인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 점을 필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창세기와 똑같은 폭력과 죽임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말로나 행동이나 생각으로라도 폭력자가 되지 않도록 온갖 인내의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수도공동체 생활 중에도 참으로 필요한 덕이 그 무엇보다도 인내의 덕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인내, 희망의 인내, 사랑의 인내입니다.

 

창세기에서 인내를 배운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지혜를 배웁니다. ‘지혜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 말로 예수님의 대표적 표징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알아 본 이런 예수님의 표징을 바리사이 지도자들만 눈이 멀어 알아보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표징을 요구합니다. 분명 무지로 인한 교만과 편견, 질투가 이들을 눈멀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제가 보기에 바리사이들은 불순한 생각을 잠시 제쳐놓고 끝까지 인내하며 예수님의 표징을 깨닫도록해야 옳았습니다. 이런 완고함에 눈먼이들에게는 회개를 제외한 약이 없습니다. 이들의 완고함에 깊이 탄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회개란 화두를 던지고 그들을 버려두신 채 홀연히, 미련없이, 집착함이 없이 떠나는 참으로 지혜로운 예수님의 처신이십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눈만 열리면 어디나 하느님 사랑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 사랑의 표징들을 알아보게 하시고 참 좋은 인내심도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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