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희망, 회개, 구원의 표징 -무지개와 십자가-2019.2.21.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 학자(1007-1072)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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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21.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 학자(1007-1072) 기념일 

창세9,1-13 마르8,27-33

 

 

 

영원한 희망, 회개, 구원의 표징

-무지개와 십자가-

 

 

 

바라볼 대상이, 바라볼 구원의 표징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여기 요셉수도원에 30년 이상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본 것이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입니다. 가장 먼저 낸 시집 제목도 ‘하늘과 산’이었고, 하늘과 산 그림으로 된 수도원 로고도 제가 참 좋아합니다. 

 

절망, 실망, 원망의 삼망한 적은 없어도 막막하거나 답답할 때는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며 읊는 시편이 있습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어데서 구원이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하늘 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시편121,1-2).

 

그러니 저에겐 언제나 그 자리의 불암산은 하느님을 연상케 하는 일종의 구원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바라 볼 영원한 구원의 표징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잘 잊는 망각의 동물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참 아름다운 영원한 구원의 표징을 발견합니다.

 

바로 무지개입니다. 세상 어디서나 때로 비온 후 볼 수 있는 꿈길같은 하늘과 지상을 잇는 하늘길 같은 무지개입니다. 요즘은 공기가 오염된 탓인지 예전만큼 무지개를 대할 수 없긴 합니다만 무지개를 대했을 때는 누구나 동심으로 설레는 마음일 것입니다. 영국의 낭만주의 계관 시인 워드워즈의 무지개란 시가 생각납니다.

 

-“저 하늘 무지개를 보면/내 가슴은 뛰노라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어른인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그러하리/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으리!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내 하루하루가/자연의 경건함 속에 있기를”-

 

나이에 상관없이 늘 설레는 동심으로 경건함을 잃지 않고 살게 해달라는 바람이 담긴 기도시처럼 생각됩니다. 오늘 창세기에 나오는 영원 구원의 표징, 무지개의 표징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하느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다.”(창세9,12-13).

 

하늘에서 하느님이, 땅에서 사람이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영원한 구원의 표징인 무지개가 흡사 하늘에 달린 십자가를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은 무지개를 바라 볼 때마다 끝까지 사람이 회개할 때 까지 기다리며 인내하실 것이며, 사람은 무지개를 바라 볼 때마다 노아시대 죄로 인한 멸망을 상기하면서 새삼 회개와 자제로 자기를 다스릴 것이니 무지개는 사람에게 구원의 표징이자 동시에 회개의 표징이 됨을 깨닫게 됩니다. 

 

좌우간 차별이나 구별없이 모든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계시하는 영원한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인 무지개입니다. 구약의 무지개라면 신약에는 십자가입니다. 무지개의 표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비로소 완전한 구원의 표징을 선사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고백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문득 요한복음에서 주님의 베드로를 향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 물음에 매 번 사랑을 고백하던 베드로의 답변이 떠오릅니다. 사랑할 때 알고 사랑하는 만큼 보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의 정체를 알아 본 베드로의 놀랍고 신선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완전히 오해요 착각이었음이 탄로됩니다. 고난과 죽음, 부활로 완결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이해가 결여되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표징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분명 베드로는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 승리의 그리스도만 확신했음이 분명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지체없는 질책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졸지에 수제자에서 사탄이 되어버린 베드로입니다. 새삼 사탄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는 사탄이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물론이고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는 모두가 사탄편에 속합니다.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가 있어 영광의 부활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보고 관상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오늘 분도회는 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 학자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11세기 이탈리아 라벤나 출신의 성인으로 성서연구에 전념하면서 주로 은수자로 사셨던 베네딕도회 회원이었습니다. 만 65세에 세상을 떠나기 까지 영원한 구원의 표징인 주님의 십자가를 참으로 사랑하셨던 성인임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항구히 충실히 따를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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