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기도와 섬김-2019.3.20.사순 제5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2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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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20.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예레18,18-20 마태20,17-28

 

 

 

어떻게 살 것인가?

-기도와 섬김-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와 복음의 예수님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두 분 다 고립무원의 처지입니다. 특히 예레미야 예언자는 고립무원에 사면초가의 처지에 있습니다. 참으로 외롭고 힘든 처지입니다. 어제 면담중 어느 분의 “외롭다.”는 고백에 드린 말씀도 생각납니다.

 

“외로움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외로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기도하십시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의 네 번째 고백이요 복음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기도하는 예레미야입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은 필수입니다.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 들어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누가 뭐래도 하느님 앞에 떳떳하면 삽니다.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예언자의 삶에 충실했던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세태 중에도 이런 이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고, 주님의 분노를 돌리려 했던 예레미야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삶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섬김의 삶에 진력했던 분임을 깨닫습니다. 또 섬김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음도 끊임없는 기도 덕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처지도 참 외로워 보입니다. 세 번째 수난예고를 통해서 예수님은 늘 죽음을 예감하며 살았음을 봅니다. 이런 고립무원의 외로운 상황에서도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이 이런 삶의 중압감을 견뎌낼 수 있게 했음을 봅니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하는 제자들의 동상이몽의 모습은 더욱 예수님을 외롭게 했을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요 이기적입니다. 함께 해도 여전히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예고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했더라면 이런 동문서답의 반응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예고후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두 아들의 미래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에 예수님의 침착한 최종적 답변입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결과는 아버지께 달린 것이니 너희는 너희들 삶의 자리에서 삶의 과정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즉 섬김의 삶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신뢰의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문득 어제 읽은 두 글귀도 생각납니다.

 

1.행복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행복하다.

2.불행한 사람은 제각각으로 불행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비슷비슷하게 행복하다.(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소설 첫문장)

 

무엇이 진인사대천명의 자세입니까? 바로 주님을 닮아 섬김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시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세도를 부려서는 안되고 섬김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예수님의 유언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섬김과 종의 영성을, 서비스(service)와 서번트(servant)의 영성을 살라는 것입니다. 같은 어원에 뿌리 둔 섬김과 종입니다. 하여 저는 수도자들은 물론이고 믿는 이들은 모두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쉽, 섬김의 사랑, 섬김의 직무등 섬김의 삶은 우리 삶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형제를 섬기는 섬김의 직무입니다. 교황님들도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 정의합니다. 바로 섬김의 공동체 중심에 섬김의 모범으로 자리 잡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관계없이 혼자 살면 구원도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섬기라 했는데 혼자 살면 누구를사랑하고 누구를 섬깁니까? 분도 성인 역시 수도승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형제들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

 

주님을 섬기는 학원 공동체에서 평생 섬김의 삶을 배워야 하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분도성인의 중용의 덕이 빛나는 장면입니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온건하고 적절한 섬김의 수행을 권하는 분도성인입니다. 서로 보살피고(caring), 나누고(sharing), 주고(giving), 지지해주는(supporting)는 것이 바로 섬김(serving)의 삶입니다. 복음적 삶의 진수가 섬김의 삶이요 공동체 삶의 아름다움 역시 섬김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섬기러 오시어, 아름다운 섬김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고, 섬김의 사람들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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