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기쁨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읍시다-2019.3.23.사순 제2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2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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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23.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7,14-15.18-20 루카15,1-3.11ㄴ-32

 

 

 

하느님의 기쁨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읍시다-

 

 

 

오늘은 유명한 루카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200주년 성서주석에는 ‘잃은 아들을 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순복음 교회도 있지만 복음중의 복음이, '순복음(pure Gospel)'이 오늘 복음입니다. 똑같은 복음이 다 다음주 사순 제4주일(3.31), 장미주일에 또 나옵니다. 예수님을 통해 전달되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참 모습입니다. 읽을 때 마다 늘 새로운 감동으로 와닿는 복음입니다.

 

오늘 비유를 묵상하던 중 두 가지 경우가 생각났습니다. 거의 20년 만에, 중학생 때 보고 오랜만에 저를 찾았던 어느 자매입니다. 그 자매의 어머니를 통해 힘든 사정을 듣고 참 많이 그 자매를 위해 미사도 봉헌하고 기도도 드렸는데 얼마전 참으로 뜻밖에 저를 찾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요! 더 신기한 것은 집무실로 사용하는 고백상담실에서 함께 찍은 사진 옆면에 오늘 복음의 렘브란트 그림이 찍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흡사 제가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고 그 자매가 돌아온 아들(딸)이 된 느낌이 참 절묘했습니다. 새삼 고백상담실에 적절한 렘브란트이 그림임을 확인했습니다.   

 

또 하나는 고맙게도 얼마동안 수도원에 함께 거주하는 도반 사제로부터 선물받은 책입니다. 오늘 복음을 소재로 한 ‘헨리 나웬의 돌아온 아들’입니다. 목차는 ‘제1부;작은 아들, 제2부;큰 아들, 제3부;아버지, 결론;아버지가 되기, 종언;그림을 살기’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복음입니다. 우리 안에는 아버지의 자비하신 마음도 있고 외적으로는 큰 아들의 모범적이나 편협한 마음도 있고 작은 아들의 회개하여 겸손한 마음도 혼재함을 느낍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많이 속하는 지요.

 

바로 우리를 회개에로 초대하는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작은 아들같이 아버지를 떠나 헤매는 처지에 있다면 지체없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회개가 필요하고 큰 아들같이 모범적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자는 마음이 완고함으로 굳어져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돌아갈 자비하신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광야인생을 살아가면서 돌아갈 집이 없다면, 돌아가 회개하여 고백성사에, 성체성사에 참여할 주님의 집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하고 답답하겠는지요. 곤경중에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며 회개하는 작은 아들의 독백이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 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 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참으로 곤경중에 회개로 비워지고 정화되어 제정신을 찾는 작은 아들이요 꿈에 그리던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환입니다. 큰 잔치를 베풀어 작은 아들을 환대하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 또한 감동입니다.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귀환함으로 본래의 존엄한 품위를 찾은 작은 아들입니다. 흡사 거지신세에서 왕자다운 본래의 품위를 찾은 모습입니다. 그대로 작은 아들처럼 살다가 회개하여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들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큰 아들의 반응도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아들의 처지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환대에 화가 난 큰 아들의 반발이 노골적입니다. 큰 아들 역시 이런 자기의 어둔 내면을 체험하기는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큰 아들의 본심이 여과없이 표현됩니다. 평생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섬기며 살았지만 ‘자녀답게’ 산 것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습니다. ‘아우’를 ‘저 아들’이라 부릅니다. 참 어처구니 없는 큰 아들의 반응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큰 아들이 마음은 아버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거리상으로는 가장 멀리 있던 작은 아들이 오히려 아버지 가까이 있는 역설적 모습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다운 반응이 또한 감동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대로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너의 아우'로 형제관계를 확인시키는 아버지입니다. 큰 아들을 참 부끄럽게 하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비단 복음의 큰 아들뿐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서 잘 산다고 자부하는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교회내의 모든 큰 아들같은 이들이 여기에 해당되겠습니다. 아마 복음의 큰 아들은 회개하여 작은 아우와 함께 아버지가 베푸신 잔치에 참석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을 듣는 모든 이들이 회개와 더불어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을 것을 촉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평생과제를 기억하게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러니 제1독서의 미카 예언자처럼 끊임없이 주님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자비하신 아버지를 본받도록 회개의 삶에 항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저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통해 회개한 큰 아들같기도 하고 작은 아들같기도 한 우리를 환대해 주시고 당신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당신을 닮게 하시며 아버지의 자녀다운 본래의 품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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