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찾는 여정 -체험, 겸손, 회개, 열매-2019.3.24. 사순 제3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2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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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24. 사순 제3주일                                                        탈출3,1ㄱㄷ.13-15 1코린10,1-6.10-12 루카13,1-9

 

 

 

하느님을 찾는 여정

-체험, 겸손, 회개, 열매-

 

 

 

김형석 교수는 100세에도 여전히 정정하여 얼마전 책도 펴냈다 합니다. 70년대 안병욱 교수와 더불어 참 많이 읽었던 교수님의 수필집이었습니다. 교수님은 100세 노년 성공적 삶의 세 필수적 요소로 ‘지혜, 취미, 봉사’를 꼽았습니다.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만 가톨릭 수도사제인 제가 보기엔 결정적으로 하나가 빠졌으니 바로 하느님과의 소통인 기도입니다.

 

얼마전 전혀 뜻밖의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지인이 본당 50년사를 만들면서 본당 출신인 저에게 명함판 사진을 부탁해 드렸는데 다른 사진 없느냐며 물었고, 혹시 여권 사진을 보자 했습니다. 현재의 여권에 붙은 사진과 이미 폐기된 여권에 붙은 사진 둘을 갖다 드리니 폐기된 여권이 사진이 좋다 하며 가져갔습니다. 

 

그제서야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바로 폐기된 여권에 붙은 사진이 바로 제일 젊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나이에 맞게 당당하게 살아 온 저에겐 전혀 생각지 못한 충격이었습니다. 새삼 사람들이 얼마나 젊음을 선호하는지 깨달았고 하루하루의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면서 나이에 맞게 아름답게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라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우리 삶의 전부라 고백합니다. 여기서 부각되는 체험, 겸손, 회개, 열매의 네 요소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체험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해야 영혼이 살고 육신이 삽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알아야 나를 알고 비로소 무지에서 해방됩니다. 어제 본기도의 첫부분, ‘하느님, 영광스러운 이 성사로, 세상에 사는 우리가 천상 것을 맛보게 하셨으니,---’ 대목도 생각납니다.

 

바로 하느님 체험을 뜻하는 천상 것의 맛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모세의 하느님 체험이 인상적입니다.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고, 모세는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응답합니다. 주님은 외로운 광야에서 양떼를 돌보던 모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모세는 주님을 만나 소명을 받았고, 주님은 당신 이름을 계시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자신을 알았고 주님을 앎으로 비로소 참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모세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 나를 발견하여 새롭게 시작된 모세의 삶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나 부름 받았기에 지금 여기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매일 평생 끊임없이 만나 체험해야 하는 하느님입니다.

 

둘째, 겸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 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지혜와 겸손입니다. 흙에 어원을 둔 겸손과 사람입니다. ‘흙humus’처럼 ‘겸손humilitas’해야 비로소 ‘사람homo’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겸손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들이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투덜거린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무슨 경고입니까? 겸손해야 한다는 경고이자 가르침입니다. 겸손한 자들은 결코 불평 불만하여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섰다하면 넘어집니다. 삼가 깨어 조심하여 겸손하게 살라는 경고입니다.

 

셋째, 회개입니다.

회개해야 삽니다. 하느님을 만나 회개할 때 비로소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의 가르침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변을 당한 것은,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은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불행이나 불운은 죄와는 무관합니다. 백해무익한 죄책감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죄를 찾아 벌하는 인과응보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는 표징으로 읽어야 합니다. 두 번씩 반복되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하느님 내리시는 재앙의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죄로 말미암아 자초하는 재앙의 심판입니다. 탓할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체없는 회개로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부단한 회개입니다. 하여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넷째, 열매입니다.

회개의 열매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신망애의 열매입니다. 인생가을이 되어도 열매없는 인생이라면 참 허무할 것입니다. 예전 가을 수확기 흉작으로 인한 ‘텅 빈 허무’의 배밭 풍경을 잊지 못합니다. 종전의 풍작후 수확후의 ‘텅 빈 충만’의 배밭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과연 인생사계로 압축할 때 우리는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는지요. 인생 열매는, 신망애의 영적 열매는 잘 익어가고 있는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후반부 무화과 나무의 비유가 회개의 열매에 적절한 비유입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 연장되는 우리의 날들입니다. 포도 재배인과 주인의 대화입니다. 흡사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처럼 생각됩니다. 

 

“보게, 내가 삼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 가?”

 

혹시 이런 처지는 아닌지요. 회개가 없으면 열매도 없습니다. 말만 많고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흡사 잎사귀들은 무성한 데 열매 없는 나무처럼 공허할 뿐입니다. 회개할 때 영혼의 향기에 순수한 마음이요 이런 ‘마음의 토양’, ‘마음의 나무’에서 지혜와 자비, 온유와 겸손, 신망애의 탐스런 열매들입니다. 다음 포도 재배인의 간청은 그대로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간청처럼 들립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엄중하게 받아 드려야 합니다. 부단한 수행으로 우리 마음의 나무들 둘레에 거름을 주며 가꾸고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나무들이 풍성한 좋은 열매를 맺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여정중의 네 요소, 체험, 겸손, 회개, 열매를 마음 깊이 꼭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시편103,8과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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